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ROMANS 9:16
기독교한국침례회 은혜교회 · 담임목사 박동준
Introduction · 들어가며
9장 들어가며
8장의 확신이 흔들리지 않으려면 반드시 답해야 할 질문
8장은 "아무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승리의 선언으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9장은 갑자기 깊은 슬픔으로 시작합니다. "내가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왜일까요?
8장을 들은 로마 성도들, 특히 이방인 성도들은 이렇게 물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그렇게 확실하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 대부분이 메시아 예수를 거부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이 실패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에게 하신 약속은 믿을 수 있는가?" 9-11장은 이 질문에 대한 바울의 대답입니다. 이것은 로마서의 부록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변호하는 핵심 단락입니다.
9장의 흐름은 이렇습니다. 바울의 탄식(1-5절) → 하나님의 말씀은 실패하지 않았다, 참 이스라엘은 약속의 자녀다(6-13절) → 그렇다면 하나님이 불공평하신가? 아니다,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실 주권이 있으시다(14-18절) → 그렇다면 왜 사람을 탓하시는가? 토기장이의 비유(19-23절) →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 중에서 부르셨다(24-29절) → 이스라엘이 넘어진 이유는 행위를 의지했기 때문이다(30-33절).
큰 질문
하나님의 약속은 실패했는가?
9:6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가 9-11장 전체의 주제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변호합니다.
구약의 증인들
아브라함·이삭·야곱·모세·바로·호세아·이사야
9장에만 구약 인용이 열 번 넘게 나옵니다. 바울은 자기 주장이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 자체로 증명합니다.
주의
예정론 논쟁의 본문
9장은 교회사에서 예정과 자유의지 논쟁의 중심이 된 본문입니다. 각 견해를 존중하며, 바울이 무엇을 위해 이 말을 하는지 문맥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Reading Guide · 읽기 안내
이 장을 읽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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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상 짚어 둘 곳
무엇을 알아야 하나
3절 "저주를 받아"
원문 아나테마, '하나님께 바쳐져 멸망에 넘겨진 것'.
5절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
구두점 위치에 따라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 부르는지가 갈립니다. 노트 참고.
11절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한 목적.
13절 "미워하였다"
히브리식 비교 표현. '덜 사랑하다, 택하지 않다'의 뜻. 노트 참고.
18절 "강퍅케"
剛愎, 마음을 완고하게 함.
20절 "힐문하느뇨"
詰問, 따져 묻다, 말대꾸하다.
22절 "관용하시고"
寬容, 너그럽게 참아 주심.
28절 "이루고 필하시리라"
畢, 끝마치다. 원문은 '완성하고 줄여서'.
33절 "거치는 돌"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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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5내 골육 친척을 위하여 — 바울의 큰 근심과 이스라엘의 특권
바울은 이스라엘에 대한 어려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자기 마음을 엽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배신자, 유대교를 버린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바울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오히려 동족을 위해 자기 구원까지 내놓을 수 있을 만큼 사랑한다는 것을 맹세하듯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받은 특권을 하나씩 나열합니다.
1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한다 — 양심이 성령 안에서 증거한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의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직역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있으며 거짓말하지 않는다. 나의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함께 증언한다.
바울은 마치 법정에서 선서하듯 시작합니다. 세 겹의 맹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그리고 "나의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왜 이렇게까지 강조할까요? 바울이 이제 할 말은 듣기에 따라 '이스라엘이 버림받았다'는 말로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민족의 배신자'로 보았습니다(행 21:28). 바울은 자기가 동족을 미워해서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싶었습니다.
8:16에서 성령께서 "우리 영으로 더불어" 증거하셨듯, 여기서는 바울의 양심이 성령 안에서 함께 증언합니다. 성령께서 조명하시는 양심은 믿을 만한 증인입니다.
원어 · 번역 노트
그리스도 안에서 — 맹세의 표현. 고후 2:17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11:10, 딤전 2:7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와 비슷합니다.
증거하노니쉼마르튀레오 — 2:15, 8:16과 같은 '함께 증언하다'.
함께 읽을 말씀
롬 8:16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고후 11:31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하는 것을 아시느니라
갈 1:20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2나에게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
내가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직역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는 끊임없는 고통이 있다.
8장의 기쁨에서 9장의 슬픔으로 갑자기 바뀝니다. 그러나 둘은 모순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아는 사람일수록, 그 사랑을 모르는 사람을 위해 더 깊이 슬퍼합니다.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 가끔 생각나는 서운함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찌르는 아픔입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37). 예레미야도 "눈물 흘리는 선지자"였습니다. "어찌하면 나의 머리는 물이 되고 나의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살륙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하리로다"(렘 9:1).
원어 · 번역 노트
그치지 않는아디알레이프토스 — 1:9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아디알레이프토스)와 같은 어근. 로마 교회를 위해 쉬지 않고 기도했듯, 동족을 위해 쉬지 않고 아파합니다.
함께 읽을 말씀
마 23:37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내가 너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눅 19:41-42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렘 9:1어찌하면 나의 머리는 물이 되고 나의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롬 10:1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3내 형제를 위해서라면 내가 저주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겠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직역 나는 내 형제들, 곧 육신으로 나의 친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기라도 원할 수 있겠다.
성경에서 가장 충격적인 고백 중 하나입니다. 8:35-39에서 바울은 아무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에서, 동족만 구원받을 수 있다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좋겠다고 말합니다.
"저주를 받아"로 번역된 '아나테마'는 구약의 '헤렘', 곧 하나님께 바쳐져 완전히 멸망당하는 것을 가리킵니다(수 6:17 여리고). 바울은 동족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기가 대신 그 저주를 받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모세의 기도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죄를 지었을 때, 모세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합의하시오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2). 바울은 원문에서 '원할 수 있겠다'라는 표현(미완료)을 씁니다. 실제로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8:38-39), 마음은 그 정도까지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하신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실제로 "저주를 받은 바 되사"(갈 3:13)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으셨습니다("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바울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았습니다.
원어 · 번역 노트
저주아나테마 — 고전 12:3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16:22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8-9 "저주를 받을지어다"에 쓰였습니다.
원하는 바로라에우코멘 — 미완료 시제로 '원할 수도 있겠다, 원할 지경이다'라는 뜻. 실현 불가능한 소원을 표현합니다.
함께 읽을 말씀
출 32:31-32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갈 3:1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고전 9:20-22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롬 8:35, 39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끊을 수 없으리라
4이스라엘의 특권 — 양자 됨, 영광, 언약, 율법, 예배, 약속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직역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아들로 삼으심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주심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받은 특권을 나열합니다. 3:2에서 "범사에 많으니"라고 했던 그 특권들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을 깎아내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주셨는지 기억합니다.
① "이스라엘 사람" — 야곱이 얍복 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한 뒤 받은 이름(창 32:28). ② "양자 됨" —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출 4:22). 8:15에서 신자들이 받은 '양자의 영'은 원래 이스라엘의 특권이었습니다. ③ "영광" — 광야의 구름 기둥과 불기둥, 성막과 성전에 임한 하나님의 영광(출 40:34, 왕상 8:11). ④ "언약들" — 아브라함, 모세, 다윗과 맺은 언약, 그리고 예레미야의 새 언약. ⑤ "율법을 세우신 것" —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율법. ⑥ "예배" — 성막과 성전의 제사. ⑦ "약속들" — 메시아와 회복에 대한 모든 약속.
이 목록은 8장에서 신자들이 받은 복과 놀랍도록 겹칩니다. 양자 됨(8:15, 23), 영광(8:17-18, 30). 이방인 신자들이 받은 복은 원래 이스라엘의 것이었고, 이방인들은 그 뿌리에 접붙여졌습니다(11:17-18).
원어 · 번역 노트
율법을 세우신 것노모테시아 — 신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단어. '율법 수여'.
언약들 — 일부 사본은 단수 "언약". 복수가 더 오래된 사본의 읽기로, 여러 언약을 가리킵니다.
함께 읽을 말씀
출 4:22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출 40:34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신 7:6-8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시고 너를 택하심은… 다만 여호와께서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롬 3:2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엡 2:12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5조상들과 그리스도 — 만물 위에 계셔 영원히 찬양받으실 하나님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직역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며, 육신으로는 그리스도도 그들에게서 나셨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며 영원히 찬양받으실 분이시다. 아멘.
여덟째 특권은 "조상들", 곧 아브라함, 이삭, 야곱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부르셨습니다(출 3:6).
그리고 마지막, 가장 큰 특권입니다.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아들이십니다. 1:3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와 같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육신으로 하면'이라고 조심스럽게 덧붙입니다. 그리스도는 육신으로는 이스라엘의 후손이시지만, 그것이 그분의 전부가 아닙니다.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개역한글』을 비롯한 대부분의 전통적 번역은 이 문장을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으로 읽습니다. 육신으로는 이스라엘에서 나셨지만,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거부한 그 메시아가 바로 영원히 찬양받으실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것이 바울의 슬픔을 더 깊게 합니다.
원어 · 번역 노트
구두점 문제 — 원문 사본에는 쉼표나 마침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① "그리스도가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이시며 영원히 찬양받으실 분이시다"(그리스도 = 하나님, 『개역』, 『개역개정』, 대부분의 교부와 전통 해석), ② "그리스도가 나셨다.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은 영원히 찬양받으소서"(별도의 송영, 일부 현대 번역)로 읽힙니다. 문법적으로는 ①이 더 자연스럽다는 학자가 많습니다. 바울은 보통 송영을 "찬양받으실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찬양받으소서" 순서로 쓰고, '육신으로 하면'이라는 말이 짝('신성으로는')을 기대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세세에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 '영원히'. 1:25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자이시로다 아멘"과 같은 표현입니다.
바울은 8장의 기쁨을 누리면서도 아직 그 기쁨을 모르는 동족을 위해 그치지 않는 고통을 느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깊은 사람은 차가운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잃어버린 사람을 위해 더 뜨겁게 우는 사람입니다.
내 가족, 친척, 친구 중에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들의 이름을 떠올리며 바울의 마음으로 기도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하나님께 받았는지, 하나님이 그들을 얼마나 오래 기다리고 계신지도 기억하십시오.
9:6–13하나님의 말씀은 폐하여지지 않았다 — 육신의 자녀가 아니라 약속의 자녀
이제 바울은 9-11장의 주제를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의 대부분이 믿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처음부터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약속'에 근거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이스라엘의 첫 세대인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로 증명합니다.
6하나님의 말씀은 실패하지 않았다 — 이스라엘에게서 난 자가 다 이스라엘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직역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실패한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에서 난 자들이 모두 이스라엘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9-11장 전체의 주제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폐하여지다'는 원래 꽃잎이 떨어지거나 배가 항로를 벗어나 좌초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사야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여기서 바울은 '이스라엘'을 두 가지 의미로 씁니다. 첫 번째 '이스라엘'은 야곱(이스라엘)의 혈통적 후손 전체입니다. 두 번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참 이스라엘입니다. 혈통적 이스라엘 안에 참 이스라엘이 있지만, 둘이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2:28-29에서 이미 말한 원리입니다.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그리고 이것은 바울이 새로 만든 생각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역사 내내 '남은 자'가 있었습니다. 엘리야 시대에도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이 있었습니다(11:4).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그 '남은 자'를 통해 이어져 왔습니다.
원어 · 번역 노트
폐하여진에크피프토 — '떨어져 나가다'. 약 1:11, 벧전 1:24 "꽃은 떨어지되", 고전 13:8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에 쓰였습니다.
것 같지 않도다 — 원문 우크 호이온 데, "그렇다고 ~한 것은 아니다". 강한 부정입니다.
함께 읽을 말씀
사 40:8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롬 2:28-29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롬 3:3-4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갈 6:16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요 1:47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7아브라함의 씨라고 다 자녀가 아니다 — 이삭에게서 난 자가 네 씨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직역 아브라함의 씨라고 해서 모두 그의 자녀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삭에게서 난 자가 네 씨라 불릴 것이다" 하셨다.
바울은 첫 번째 예로 아브라함의 두 아들을 듭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과 이삭이 있었습니다. 둘 다 아브라함의 친아들, 곧 '아브라함의 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창 21:12)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원리를 받아들이는 데 문제가 없었습니다. 이스마엘의 후손(아랍 민족)이 언약 백성이 아니라는 것은 그들도 인정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혈통'이라는 것만으로는 언약 백성이 될 수 없다는 원리도 인정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백성은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으로 정해졌습니다.
원어 · 번역 노트
인용 — 창 21:12(70인역)을 그대로 인용.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라고 하실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히 11:18에도 인용됩니다.
함께 읽을 말씀
창 21:12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갈 4:22-23, 28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히 11:17-18저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8육신의 자녀가 아니라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겨진다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직역 곧 육신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라, 약속의 자녀들이 씨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7절의 원리를 정리합니다. "육신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의 구별입니다.
이스마엘은 '육신의 자녀'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하갈)으로 낳은 아들입니다. 이삭은 '약속의 자녀'였습니다. 자연적으로는 불가능한 상황(백 세와 구십 세, 4:19)에서, 오직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으로 태어난 아들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원리가 지금도 똑같다고 말합니다. 혈통, 출생, 인간적인 조건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으로 태어날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요한복음 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그리고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는 4장의 '의로 여기심'과 같은 동사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산해 넣으시는' 것입니다.
원어 · 번역 노트
약속의 자녀 — 갈 4: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바울은 이방인 신자들도 이삭처럼 '약속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함께 읽을 말씀
요 1:12-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갈 3:29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 4:28-29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롬 4:16-17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9약속의 말씀 — 내년 이때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직역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다. "정한 이때에 내가 올 것이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약속의 자녀'가 무슨 뜻인지 바울은 그 약속 자체를 인용해 보여 줍니다. 창세기 18장, 하나님께서 세 나그네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의 장막을 찾아오셨을 때 하신 말씀입니다. "명년 이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그때 사라는 장막 뒤에서 이 말을 듣고 속으로 웃었습니다.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창 18:12). 그러자 하나님은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18:14)고 하셨습니다. 이삭은 사람의 가능성이 완전히 끝난 자리에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약속의 자녀'입니다.
원어 · 번역 노트
인용 — 창 18:10과 14를 합쳐 인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르리니 — '내가 오리니'. 하나님께서 직접 오셔서 약속을 이루신다는 뜻입니다.
함께 읽을 말씀
창 18:10-14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창 21:1-2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롬 4:19-21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10리브가도 한 사람 이삭으로 말미암아 쌍둥이를 잉태했다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직역 그뿐 아니라 리브가도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바울은 두 번째, 더 강력한 예를 듭니다. 유대인은 이렇게 반박할 수 있습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은 어머니가 달랐다. 이스마엘은 여종의 아들이었다. 그러니 이삭이 택함받은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 세대로 갑니다.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에서와 야곱은 아버지도 같고(이삭), 어머니도 같고(리브가), 심지어 같은 날 같은 태에서 태어난 쌍둥이였습니다. 인간적인 조건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에서가 먼저 태어난 장자였으니 인간적으로는 에서가 더 유리했습니다.
원어 · 번역 노트
잉태하였는데 — 원문 코이텐 에쿠사, "한 번의 동침으로 잉태하여". 같은 순간에 잉태된 쌍둥이임을 강조합니다.
함께 읽을 말씀
창 25:21-26리브가가 잉태하매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동이가 있었는데
11아직 태어나지도, 선악을 행하지도 않았을 때 — 하나님의 선택의 목적이 서게 하려고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직역 그 아이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않았을 때에, 선택에 따른 하나님의 목적이 행위가 아니라 부르시는 분으로 말미암아 서도록 하시려고,
여기서 바울은 핵심을 짚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서와 야곱 중 야곱을 택하신 것은 언제였습니까?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태어나기도 전이었습니다. 야곱이 에서보다 착해서도 아니었고(실제로 야곱은 형을 속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에서가 나빠서도 아니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근거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3-4장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은혜로'와 같은 원리입니다. 4:4-5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믿는 자에게는."
중요한 것은 바울이 이 말을 하는 목적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개인이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 미리 정해져 있다'는 이론을 세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9:6의 질문, 곧 '이스라엘 대부분이 믿지 않는데 하나님의 약속은 실패했는가?'에 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처음부터 '혈통과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에 근거했으니, 혈통적 이스라엘의 불신앙이 하나님의 약속을 무너뜨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뜻프로테시스 — 8:28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같은 단어. '목적, 계획'.
서게 하려메네 — '머물다, 확고히 서 있다'. 하나님의 목적은 변하지 않고 굳게 섭니다.
함께 읽을 말씀
엡 1:4-5, 11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딤후 1:9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롬 4:4-5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11:5-6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12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직역 리브가에게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창세기 25:23의 인용입니다. 리브가의 배 속에서 쌍둥이가 서로 싸우자, 리브가가 여호와께 물었고, 하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고대 사회에서 장자는 특별한 지위와 상속권을 가졌습니다. 동생이 형을 섬기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질서를 뒤집으셨습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에 흐르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장자 가인 대신 아벨을, 이스마엘 대신 이삭을, 에서 대신 야곱을, 르우벤 대신 요셉과 유다를, 므낫세 대신 에브라임을, 다윗의 형들 대신 막내 다윗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사람의 기준을 따르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27-29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이 말씀은 원래 두 개인보다 '두 민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야곱의 후손 이스라엘과 에서의 후손 에돔에 관한 예언입니다.
원어 · 번역 노트
인용 — 창 25:23(70인역) 그대로. 실제 역사에서 다윗 시대에 에돔이 이스라엘에게 정복되어 섬기게 되었습니다(삼하 8:14).
함께 읽을 말씀
창 25:23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창 27:29, 37너는 형제들의 주가 되고…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삼상 16:7, 11-12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고전 1:27-29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13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직역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함과 같다.
말라기 1:2-3의 인용입니다. 많은 사람이 걸려 넘어지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을 미워하실 수 있는가?"
이 말을 이해하려면 히브리어의 표현 방식을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어에서 '사랑하다/미워하다'는 종종 감정이 아니라 선택과 우선순위를 나타내는 비교 표현입니다. 창세기 29:30-31에서 야곱이 "라헬을 레아보다 더 사랑하였더라"고 한 직후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이 없음(미움받음)을 보시고"라고 합니다. 야곱이 레아를 증오한 것이 아니라 덜 사랑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누구든지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 14:26)라고 하셨는데, 마태복음 10:37은 이것을 "나보다 아비나 어미를 더 사랑하는 자는"이라고 풀어 씁니다.
그러니 '에서를 미워했다'는 하나님이 에서를 증오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언약의 계보를 이을 사람으로 야곱을 택하시고 에서는 택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에서에게도 복을 주셨고(창 27:39-40, 33:9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이스라엘에게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너의 형제니라"(신 23:7)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말라기 1장의 문맥에서 이 말은 개인 에서와 야곱보다는 두 민족 에돔과 이스라엘에 관한 것입니다. 말라기는 바벨론 포로 이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은 회복시키셨지만 에돔은 황폐한 채로 두셨다는 역사를 가리킵니다.
원어 · 번역 노트
인용 — 말 1:2-3(70인역). 말라기는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을 의심하는 이스라엘에게 그 사랑을 확인시키는 말씀입니다.
미워하였다에미세사 — 히브리어 '사네'. 신 21:15 "사랑을 받고 하나는 미움을 받다가", 창 29:31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에서 같은 비교적 용법이 보입니다.
함께 읽을 말씀
말 1:2-3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창 29:30-31야곱이… 라헬을 레아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눅 14:26자기 부모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마 10:37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신 23:7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너의 형제니라
TODAY'S MESSAGE · 오늘의 메시지
나는 약속의 자녀입니다
이삭은 사람의 가능성이 끝난 곳에서 하나님의 약속으로 태어났습니다. 야곱은 아무 공로 없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도, 착하게 살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직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를 교만에서 지키고, 동시에 확신을 줍니다. 내 행위로 얻은 것이 아니니, 내 행위로 잃을 수도 없습니다.
9:14–18하나님께 불의가 있는가 —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
6-13절을 들은 사람은 즉시 반론을 제기할 것입니다.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 마음대로 택하신다면, 그것은 불공평하지 않은가?" 바울은 이 질문을 피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의 두 장면, 모세와 바로를 통해 답합니다.
바울의 대답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것은 '정의'의 문제가 아니라 '긍휼'의 문제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면(3:23), 정의는 모두가 심판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것은 불의가 아니라 은혜입니다.
14그렇다면 하나님께 불의가 있는가? 그럴 수 없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직역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 말하겠는가? 하나님께 불의가 있는가? 절대 그럴 수 없다!
바울은 예상되는 반론을 스스로 꺼냅니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쌍둥이 중 하나를 행위와 상관없이 택하셨다면, 그것은 불공평하지 않은가?
바울의 대답은 언제나처럼 "그럴 수 없느니라!"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불의하실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말했듯,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 18:25). 그리고 바울은 이것을 철학적 논리가 아니라 성경으로 증명합니다.
원어 · 번역 노트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 3:5, 4:1, 6:1, 7:7, 8:31에 이어 반론을 꺼내는 신호.
함께 읽을 말씀
신 32:4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롬 3:5-6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창 18:25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15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직역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다.
출애굽기 33:19의 인용입니다. 이 말씀의 배경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이 시내산 아래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긴 직후였습니다(출 32장). 그들은 율법을 받자마자 하나님과의 언약을 정면으로 깨뜨렸습니다. 정의대로라면 이스라엘 전체가 멸망해야 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내가 그들을 진멸하고"(32:10)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중보했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살려 주셨습니다.
그 후 모세가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
하나님의 '영광'과 '이름'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긍휼입니다. 그리고 그 긍휼은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기로 하신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금송아지를 섬긴 이스라엘은 긍휼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이것이 불의입니까? 아니요, 이것은 은혜입니다.
원어 · 번역 노트
인용 — 출 33:19(70인역) 그대로. 34:6-7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일부입니다.
긍휼 / 불쌍히 여김 — 히브리어 하난 / 라함. '라함'은 '모태(레헴)'와 같은 어근으로, 어머니가 자기 배에서 난 자식을 향해 느끼는 애끓는 사랑을 뜻합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직역 그러므로 그것은 원하는 자에게 달린 것도 아니고 달리는 자에게 달린 것도 아니며, 오직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달린 것이다.
15절의 결론입니다. 구원은 무엇에 달려 있습니까? 세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①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 사람의 의지와 소원이 아닙니다. ②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 사람의 노력과 수고가 아닙니다. 경주에서 열심히 달린다고 상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③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 오직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낮추는 말씀이면서 동시에 가장 큰 위로입니다. 만일 구원이 내 의지나 내 노력에 달려 있다면, 나는 늘 불안할 것입니다. 내 의지는 약하고, 내 노력은 부족하니까요. 그러나 구원이 하나님의 긍휼에 달려 있기에, 나는 안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결코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이 '아무것도 원하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 자신도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고전 9:26), "푯대를 향하여 좇아가노라"(빌 3:14)고 했습니다. 다만 우리의 원함과 달음박질이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고 달리는 것조차 하나님의 긍휼의 열매입니다(빌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원어 · 번역 노트
달음박질하는 자트레콘토스 — 바울은 신앙생활을 경주에 비유하곤 합니다(고전 9:24-26, 갈 2:2, 5:7, 빌 2:16, 딤후 4:7).
함께 읽을 말씀
엡 2:8-9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딛 3:5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빌 2:12-13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요 1:13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17바로에게 —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을 온 땅에 전파하려고 너를 세웠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직역 성경이 바로에게 말하기를, "내가 바로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일으켰으니, 곧 너를 통하여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선포되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하나님은 바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바로는 우연히 애굽의 왕이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바로를 역사의 무대에 세우셨습니다. 그 목적은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열 가지 재앙과 홍해의 기적은 수백 년 동안 온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40년 뒤 여리고의 라합은 "우리가 듣건대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셨으며…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수 2:10-11)라고 고백했습니다. 수백 년 뒤 블레셋 사람들도 "이는 애굽인을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친 신들이니라"(삼상 4:8)고 두려워했습니다. 바로의 완악함조차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에 알려지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원어 · 번역 노트
인용 — 출 9:16. 바울은 70인역의 "너를 보존하였으니"를 "너를 일으켰으니(엑세게이라)"로 바꾸어 하나님의 주도권을 강조합니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 바울은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를 '성경이 말한다'로 표현합니다. 바울에게 성경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갈 3:8).
함께 읽을 말씀
출 9:16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을 온 천하에 전파하려 하였음이니라
출 14:4, 17-18내가 바로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수 2:9-11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잠 16:4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18하나님은 원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원하시는 자를 강퍅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직역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원하시는 자를 완고하게 하신다.
15-17절의 결론입니다. 모세(긍휼)와 바로(강퍅)의 두 예를 하나로 묶습니다. 이 구절은 로마서에서 가장 어려운 구절 중 하나입니다.
먼저 출애굽기에서 바로의 마음이 어떻게 강퍅해졌는지 보아야 합니다. 출애굽기는 세 가지 표현을 씁니다. ① 바로가 스스로 마음을 강퍅케 했다(출 8:15, 32, 9:34 "바로가… 마음을 완강케 하여"). ② 바로의 마음이 강퍅해졌다(7:13, 22, 8:19). ③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다(9:12, 10:20, 27, 11:10). 특히 처음 다섯 재앙 동안은 주로 바로가 스스로 마음을 굳혔고, 여섯째 재앙부터 하나님께서 강퍅케 하셨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미 스스로 굳어진 마음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고', 그 굳어짐을 확정하셨습니다. 1:24, 26, 28의 '내어 버려 두심'과 같은 원리입니다.
바울이 이 구절에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긍휼을 베푸실지, 강퍅한 자를 내버려 두실지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긍휼을 '빚지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면,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강퍅함 속에 내버려 두시는 것은 불의가 아니라 정의입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것은 순전한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나는 강퍅하게 정해진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9장의 결론은 30-33절과 10장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10:13).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는 사람, 그 사람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긍휼 안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바로는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원어 · 번역 노트
강퍅케 剛愎 — '굳세고 고집스럽다'. 원문 스클레뤼노, 2:5 "고집(스클레로테스)", 히 3:8, 13, 15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와 같은 어근입니다.
출애굽기의 표현 — 히브리어로 '카베드'(무겁게 하다), '하자크'(강하게 하다), '카샤'(굳게 하다) 세 동사가 쓰입니다.
함께 읽을 말씀
출 8:15, 32바로가 숨을 쉬게 됨을 볼 때에 그 마음을 완강케 하여
출 9:12, 34-35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바로가… 다시 범죄하여 마음을 완강케 하니
롬 1:24, 28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롬 11:7, 25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히 3:15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케 하던 것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TODAY'S MESSAGE · 오늘의 메시지
긍휼은 빚이 아니라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왜 저 사람은 구원하시고 이 사람은 그냥 두시는가?" 이 질문 앞에서 바울은 먼저 우리 자리를 바로잡아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긍휼을 '요구할' 권리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긍휼을 '구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받았다면, 그것은 내가 원해서도, 열심히 달려서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 앞에서 남을 판단할 자리는 사라지고, 감사와 겸손만 남습니다.
9:19–23토기장이와 진흙 — 지음받은 것이 지은 이에게 따질 수 있는가
18절을 들은 사람은 다시 반론을 제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강퍅케 하신다면, 왜 사람을 탓하시는가? 누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가?" 바울은 이 질문에 논리로 답하기보다, 먼저 그 질문을 던지는 사람의 자리를 묻습니다. 그리고 구약 선지자들이 즐겨 쓰던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를 꺼냅니다.
19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탓하시는가? 누가 그 뜻을 거스르는가?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직역 그러면 너는 내게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아직도 탓하시는가? 누가 그분의 뜻을 거역할 수 있단 말인가?"
바울은 상대의 반론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던지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다 정하신다면 내 책임은 무엇인가? 바로가 강퍅해진 것이 하나님 때문이라면 바로를 왜 심판하시는가?"
이 질문은 사람의 책임을 하나님께 떠넘기는 질문입니다. 아담도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결국 '하나님 당신 탓'이라는 것입니다.
원어 · 번역 노트
허물하시느뇨 — 원문 티 에티 멤페타이, "왜 아직도 탓하시는가?"
함께 읽을 말씀
창 3:12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약 1:13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욥 9:12누가 능히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하고 누가 능히 물을 수 있으랴
20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하나님께 따지느냐
이 사람아 네가 누구관대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직역 오히려, 오 사람아, 하나님께 말대꾸하는 너는 누구냐? 빚어진 것이 빚은 이에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말하겠느냐?
바울은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습니다. 대신 질문하는 사람에게 묻습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관대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힐문하다'는 따져 묻다, 말대꾸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피고석에 앉히고 사람이 재판관 노릇을 하려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질문 자체를 금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 정직하게 묻고 탄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욥, 시편 기자들, 하박국). 바울이 꾸짖는 것은 정직한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고발하려는 교만한 태도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고 나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잊은 태도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사야 29:16과 45:9를 떠올리게 하는 그림을 씁니다.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이사야 45:9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너의 만든 것이 너를 가리켜 그는 손이 없다 할 수 있겠느냐." 창세기 2:7에서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습니다'. 바울이 쓴 '지음을 받은 물건'과 '지은 자'는 바로 그 '빚다'라는 동사입니다.
원어 · 번역 노트
힐문하느뇨 詰問 — '따져 물음'. 원문 안타포크리노마이, '맞받아 대답하다'. 눅 14:6 "저희가 이에 대하여 대답지 못하니라"에 쓰였습니다.
지음을 받은 물건 / 지은 자 — 플라스마 / 플라산티. '플라소'는 진흙을 빚는 동작으로, 70인역 창 2:7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에플라센)"에 쓰였습니다. 영어 plastic의 어원입니다.
함께 읽을 말씀
사 45:9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할 수 있겠느냐
사 29:16토기장이를 어찌 진흙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자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욥 40:2, 8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네가 내 심판을 폐하려느냐
욥 42:2-6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21토기장이가 한 덩이 진흙으로 귀한 그릇과 천한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직역 혹은 토기장이가 같은 진흙 덩이로 하나는 귀하게 쓸 그릇을,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예레미야 18장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토기장이의 집으로 보내셨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뭉쳐서 다른 그릇을 만드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렘 18:6).
바울의 요점은 "권이 없느냐", 곧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토기장이는 같은 진흙 덩이로 다른 용도의 그릇을 만들 권리가 있습니다.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왜 나는 꽃병이 아니라 요강으로 만들었느냐"고 따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천히 쓸 그릇'은 '멸망할 그릇'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쓰일 그릇'입니다. 디모데후서 2:20-21에서 바울은 큰 집에는 귀히 쓰는 그릇도 있고 천히 쓰는 그릇도 있다고 하면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18장의 문맥은 하나님께서 진흙을 다시 빚으실 수 있다는 것, 곧 회개하면 재앙을 거두시고(18:8), 악을 행하면 복을 거두신다(18:10)는 것입니다. 토기장이의 비유는 숙명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사람의 반응이 함께 있는 그림입니다.
원어 · 번역 노트
진흙 한 덩이 — 같은 재료입니다. 모든 인류는 같은 '진흙', 곧 아담 안에서 같은 죄인입니다(5:12). 귀한 그릇이 된 사람이 원래 더 좋은 진흙이었던 것이 아닙니다.
권엑수시아 — '권한, 권세'. 13:1 "위에 있는 권세들"에 쓰인 단어입니다.
함께 읽을 말씀
렘 18:1-10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그 민족이 그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딤후 2:20-21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사 64:8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고후 4:7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22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셨다면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직역 만일 하나님께서 진노를 보이시고 자기 능력을 알리기 원하시면서도, 멸망에 맞게 된 진노의 그릇들을 많은 오래 참으심으로 견디셨다면,
22-23절은 문장이 완성되지 않은 '만일' 문장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하셨다면… (그것이 무엇이 문제냐?)" 바울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는 진노를 보이실 권리가 있습니다(1:18). 그런데 하나님은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즉시 심판하지 않으시고 오래 참으셨습니다. 바로에게도 열 번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2:4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과 같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여기서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23절에서 긍휼의 그릇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능동태, 하나님이 주어) 그릇입니다. 그런데 22절의 진노의 그릇은 '준비된'(수동태 또는 중간태, 주어가 명시되지 않음) 그릇입니다. 많은 해석자들은 바울이 의도적으로 표현을 달리했다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멸망하도록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죄로 멸망에 '맞게 된' 것을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신다는 것입니다.
원어 · 번역 노트
준비된카테르티스메나 — 완료 분사로, 수동태('준비되어진')로도 중간태('스스로를 준비한')로도 읽힙니다. 23절 "예비하신(프로에토이마센)"은 분명한 능동태로 하나님이 주어입니다. 이 차이에 주목한 해석은 크리소스토무스 같은 교부 시대부터 있었습니다.
관용하시고 寬容 — '너그럽게 받아들임'. 원문 에넹켄, '견디다, 참다'.
오래 참으심마크로튀미아 — 2:4 "길이 참으심"과 같은 단어.
함께 읽을 말씀
롬 2:4-5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벧후 3:9, 15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출 34:6노하기를 더디하고
겔 33:11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23영광을 위해 예비하신 긍휼의 그릇에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리려 하셨다면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직역 그리고 영광을 위해 미리 준비하신 긍휼의 그릇들에게 자기 영광의 풍성함을 알리고자 하셨다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22절의 짝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신 목적 중 하나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긍휼의 그릇은 하나님께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그릇입니다. 8:29-30의 황금 사슬과 같은 말입니다.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긍휼의 그릇이 영광에 이르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문장은 완성되지 않은 채 끝납니다. "무슨 말 하리요"는 원문에는 없고, 우리말 번역이 문장의 뜻을 살려 덧붙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면, 누가 무슨 불평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바울은 24절에서 갑자기 놀라운 사실을 밝힙니다. 그 긍휼의 그릇이 누구인지.
원어 · 번역 노트
예비하신바프로에토이마센 — '미리(프로) 준비하다(헤토이마조)'. 엡 2:10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에 쓰였습니다.
무슨 말 하리요 — 22-23절은 조건절("만일 ~라면")만 있고 결론절이 없는 문장입니다. 『개역』은 결론을 덧붙여 옮겼습니다.
함께 읽을 말씀
롬 8:29-30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엡 1:18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엡 2:7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TODAY'S MESSAGE · 오늘의 메시지
나는 토기장이의 손에 있습니다
토기장이 비유는 처음엔 두렵게 들립니다. 그러나 이사야 64:8은 같은 그림을 기도로 바꿉니다.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토기장이는 진흙을 아무렇게나 다루지 않습니다. 정성껏 빚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우리를 무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그분의 손에 맡기게 합니다. 오늘 내 삶이 이해되지 않을 때, 따지기보다 그 손에 맡겨 보십시오.
9:24–29그 그릇은 우리다 —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24절에서 바울은 갑자기 놀라운 사실을 밝힙니다. 긍휼의 그릇은 '우리', 곧 유대인과 이방인 중에서 부르심을 받은 교회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것이 구약 선지자들이 이미 예언한 것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호세아는 이방인의 부르심을(25-26절), 이사야는 이스라엘 중 남은 자의 구원을(27-29절) 예언했습니다.
24그 그릇은 우리다 —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직역 그 그릇은 곧 우리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 가운데서만이 아니라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부르신 우리다.
9장의 전환점입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이삭과 이스마엘, 야곱과 에서, 모세와 바로, 토기장이와 진흙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그릇은 우리니"라고 말합니다. 긍휼의 그릇은 먼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로마서를 읽고 있는 '우리'입니다.
그리고 그 '우리'는 누구입니까?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 6-13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안에서' 선택하셨습니다(이삭, 야곱).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선택은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 이방인에게까지 넓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정해지기 때문에(11절), 이방인도 그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9:6의 질문,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졌느냐?"에 대한 답이 더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약속의 범위를 넓히셔서 유대인 '남은 자'와 이방인을 함께 한 백성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이것이 로마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문장 연결 — 원문에서 24절은 23절 "긍휼의 그릇"을 관계대명사로 이어받습니다. "…긍휼의 그릇들, 곧 우리를, 그가 부르셨다".
함께 읽을 말씀
롬 1:16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롬 3:29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엡 2:13-16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벧전 2:9-10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25호세아 —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부르리라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직역 호세아의 글에서도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받지 못한 자를 사랑받는 자라 부르리라" 하셨다.
바울은 이방인의 부르심이 구약에 이미 예언되었다는 것을 호세아서로 보여 줍니다. 호세아 2:23의 인용입니다.
호세아서의 이야기는 감동적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자 고멜과 결혼하라고 하셨습니다. 고멜은 자녀를 낳았는데, 하나님은 그 이름을 짓게 하셨습니다. 딸의 이름은 '로루하마', 곧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 아들의 이름은 '로암미', 곧 '내 백성이 아니다'. 하나님을 배신한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이름이었습니다(호 1:6, 9).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이름을 뒤집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호 2:23). 원래 호세아에서 이것은 하나님을 떠났던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약속이 이방인에게도 적용된다고 봅니다. 원래 '내 백성이 아니었던' 이방인이 이제 '내 백성'이라 불립니다. 베드로전서 2:10도 같은 구절을 인용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원어 · 번역 노트
인용 — 호 2:23(히브리어 성경 2:25)을 바울이 순서를 바꾸고 '부르리라'를 넣어 자유롭게 인용했습니다.
원래 문맥과 바울의 적용 —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했지만, 바울은 '하나님 백성 밖에 있던 자가 백성이 되는' 원리를 이방인에게 적용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북이스라엘이 사실상 '이방인처럼' 되었다가 회복되는 것처럼, 이방인도 그렇게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함께 읽을 말씀
호 1:6-10그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그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
호 2:23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벧전 2:10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엡 2:12-13, 19그 때에 너희는…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6내 백성이 아니라 하던 그곳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직역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하신 바로 그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릴 것이다.
호세아 1:10의 인용입니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하나님은 '다른 곳에서'가 아니라 바로 그 '심판이 선언되었던 자리에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정죄가 있던 곳에 입양이 일어나고, 거절이 있던 곳에 부르심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립니다. 단지 '백성'이 아니라 '아들'입니다. 8:14-17에서 말한 하나님의 자녀, 양자 됨, 상속자의 신분입니다. 이방인이 이스라엘의 가장 큰 특권(9:4 "양자 됨")을 함께 받습니다.
원어 · 번역 노트
인용 — 호 1:10(히브리어 성경 2:1). 25절과 함께 호세아의 두 구절을 엮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 죽은 우상과 대조되는 표현(살전 1:9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함께 읽을 말씀
호 1:10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
롬 8:14-16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갈 3:26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이사야 — 이스라엘이 바다 모래 같아도 남은 자만 구원받으리라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직역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기를,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받으리니,"
25-26절이 이방인에 관한 예언이었다면, 27-29절은 이스라엘에 관한 예언입니다. 이사야 10:22-23의 인용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창 22:17)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이루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큰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경고합니다.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숫자가 많다고 해서 모두가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남은 자' 사상은 구약 전체에 흐릅니다. 하나님은 심판 중에도 언제나 작은 무리를 남겨 두셨습니다. 노아의 가족, 엘리야 시대의 칠천 명(왕상 19:18),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 이사야는 자기 아들의 이름을 '스알야숩', 곧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라고 지었습니다(사 7:3). 이것은 심판의 말씀이면서 동시에 소망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십니다. 11:5에서 바울은 "이와 같이 그런즉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고 말합니다. 바울 자신과 초대교회의 유대인 신자들이 바로 그 남은 자입니다.
원어 · 번역 노트
인용 — 사 10:22-23(70인역)을 요약해서 인용했습니다. 첫 부분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는 호 1:10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여, 25-26절의 호세아 인용과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남은 자휘폴레임마 — 11:5 "남은 자(레임마)"와 같은 개념.
함께 읽을 말씀
사 10:20-22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남은 자는 돌아오리니
창 22:17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왕상 19:18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롬 11:4-5이와 같이 그런즉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28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마치시리라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필하시리라 하셨느니라
직역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완성하고 단축하여 이루실 것이다" 하였다.
이사야 10:23의 계속입니다.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필하시리라." '필하다'는 '끝마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루십니다.
원래 이사야의 문맥에서 이것은 앗수르를 통한 심판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확신으로 읽습니다. 9:6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말씀도, 구원의 말씀도, 남은 자에 대한 말씀도 모두 이루십니다.
원어 · 번역 노트
이루고 필하시리라 — 원문 쉰텔론 카이 쉰템논, '완성하고 잘라 내어'. '단축하다'는 신속하게, 또는 남은 자만 남기고 잘라 낸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일부 사본(킹제임스)은 이사야 70인역 전체를 더 길게 인용합니다.
필하다 畢 — '마칠 필'. 끝마치다.
함께 읽을 말씀
사 10:23이미 작정된 파멸을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사 55:11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사 28:22내가 만군의 주 여호와께로서 들었나니 온 세계에 작정된 멸망이 있으리라
29만군의 주께서 씨를 남기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소돔과 고모라 같았으리라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직역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소돔처럼 되고 고모라와 같아졌을 것이다" 함과 같다.
이사야 1:9의 인용입니다. 이사야서의 첫 장, 유다의 죄를 고발하는 장면입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
소돔과 고모라는 성경에서 완전한 멸망의 상징입니다(창 19장). 하늘에서 유황과 불이 내려와 그 도시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이사야는 말합니다. 이스라엘도 그 죄로 보면 소돔과 고모라처럼 완전히 멸망해야 마땅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씨를 남겨 두셨다."
'씨'라는 말이 아름답습니다. 씨는 작지만 그 안에 생명이 있고,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수확이 자랍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안에 씨를 남겨 두셨고, 그 씨에서 결국 메시아가 나오셨고, 그 메시아를 믿는 남은 자들이 교회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하지 않은 것은 이스라엘이 의로워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9:16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가 여기서도 증명됩니다.
원어 · 번역 노트
인용 — 사 1:9(70인역) 그대로. 히브리어는 '남은 자(사리드)', 70인역은 '씨(스페르마)'.
만군의 주 — 원문 퀴리오스 사바오트. 히브리어 '체바오트'(군대들)를 번역하지 않고 음역했습니다. 약 5:4에도 나옵니다.
함께 읽을 말씀
사 1:9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
창 19:24-25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애 3:22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사 6:13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TODAY'S MESSAGE · 오늘의 메시지
나는 '내 백성 아니던 자'였습니다
호세아의 아이들의 이름은 '로암미(내 백성 아님)', '로루하마(긍휼 없음)'였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시절의 우리 이름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를 '내 백성', '사랑받는 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내가 소돔과 고모라처럼 되지 않은 것은 내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긍휼로 씨를 남겨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를 기억하면, 아직 '로암미'로 사는 사람들을 향한 마음이 달라집니다.
9:30–33이방인은 믿음으로 의를 얻고, 이스라엘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졌다
9장의 마지막 단락은 놀라운 역설로 끝납니다. 의를 추구하지 않던 이방인은 의를 얻었고, 의를 열심히 추구하던 이스라엘은 얻지 못했습니다. 왜일까요? 바울은 그 이유를 하나님의 주권(6-29절)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반응에서도 찾습니다. 그들이 믿음이 아니라 행위를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9장의 '하나님의 주권'은 10장의 '사람의 책임'으로 이어집니다.
30의를 좇지 않던 이방인이 의를 얻었다 — 믿음에서 난 의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직역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 말하겠는가? 의를 추구하지 않던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9장 전체를 정리하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역사의 놀라운 역설을 말합니다.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율법도 몰랐고, 하나님께 의롭게 되려고 애쓰지도 않았습니다. 1장에서 본 것처럼 우상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들이 의를 얻었습니다. 어떻게? "믿음에서 난 의요." 복음을 듣고 믿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의롭다 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경주에서 출발선에 서지도 않았던 사람이 결승선의 상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경주의 상이 아니라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롬 10:20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나를 문의하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사 65:1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마 21:31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롬 1: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31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그 법에 이르지 못했다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직역 그러나 의의 율법을 추구한 이스라엘은 그 율법에 이르지 못했다.
역설의 반대편입니다.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은 정말 열심히 의를 추구했습니다. 율법을 연구하고,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드리고, 정결 규례를 지켰습니다. 바울 자신도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빌 3:6). 그런데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그들은 그 율법이 목표로 하던 것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아이러니입니다. 가장 열심히 달린 사람이 결승선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왜일까요? 32절이 답합니다. 방향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반대 방향으로 달리면 결승선에서 멀어집니다.
원어 · 번역 노트
의의 법 — 표현이 독특합니다. '의를 약속하는 율법', '의를 요구하는 율법' 등으로 읽힙니다. 율법 자체는 의를 가리키지만(3:21, 10:4), 이스라엘은 그것을 잘못된 방식으로 추구했습니다.
일부 사본 — "의의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로 '의의'가 반복된 사본도 있습니다(킹제임스).
함께 읽을 말씀
빌 3:4-9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롬 10:2-3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갈 2:16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32왜 그런가? 믿음이 아니라 행위를 의지했기 때문 — 걸림돌에 걸려 넘어졌다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직역 왜 그런가? 그들이 믿음으로가 아니라 마치 행위로 되는 것처럼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에 부딪혔다.
"어찌 그러하뇨?" 왜 이스라엘은 그렇게 열심히 추구하고도 얻지 못했을까요? 지금까지 9장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바울은 이스라엘의 책임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사람의 책임은 함께 갑니다.
"저희가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원문은 "믿음으로가 아니라 마치 행위로 되는 것처럼"입니다. '마치 ~처럼'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율법은 처음부터 행위로 의를 얻으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4장의 아브라함). 그런데 이스라엘은 율법을 '마치' 행위로 의를 얻는 수단인 것처럼 잘못 사용했습니다.
그 결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길을 달리던 사람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듯, 이스라엘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 돌은 무엇입니까? 33절이 밝힙니다.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는 행위로 의를 얻으려는 사람에게는 걸림돌입니다. 고린도전서 1:23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걸림돌)이요." 내 의를 세우려는 사람에게, 아무 공로 없이 십자가만 의지하라는 복음은 자존심에 걸리는 돌입니다.
원어 · 번역 노트
마치 행위로 — 원문 호스 엑스 에르곤. 바울은 율법 자체가 행위의 원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그렇게 '잘못 여겼다'는 것입니다.
부딪힐 돌리토스 투 프로스콤마토스 — 14:13, 20-21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에서도 '프로스콤마'가 쓰입니다.
함께 읽을 말씀
고전 1: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롬 10:3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마 21:42-44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눅 2:34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33시온에 걸림돌을 두니 —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리라
기록된바 보라 내가 거치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직역 기록된 바, "보라, 내가 시온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과 넘어지게 하는 바위를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함과 같다.
바울은 이사야의 두 구절을 하나로 엮습니다. 이사야 28:16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와 이사야 8:14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같은 돌이 두 가지 역할을 합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견고한 기초석이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입니다. 같은 햇빛이 밀랍은 녹이고 진흙은 굳게 하듯, 같은 그리스도가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걸림돌이 됩니다. 베드로전서 2:6-8도 같은 두 구절을 엮어 인용합니다.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그리고 9장은 약속으로 끝납니다.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와 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과 연결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마지막 날 결코 실망하거나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10:11에서 다시 인용되면서 "누구든지(모든)"가 덧붙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9장의 하나님의 주권은 10장의 '누구든지'라는 초대로 이어집니다.
원어 · 번역 노트
인용 — 사 28:16과 8:14를 합쳐 인용했습니다. 이 두 구절의 결합은 벧전 2:6-8에도 나와서, 초대교회가 이미 이 두 구절을 함께 '그리스도는 돌이시다'라는 증언으로 사용했음을 보여 줍니다.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 히브리어 사 28:16은 "급절하게(조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70인역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리라".
함께 읽을 말씀
사 28:16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사 8:14-15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벧전 2:6-8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시 118:22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롬 10:11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니
TODAY'S MESSAGE · 오늘의 메시지
그리스도는 나에게 걸림돌입니까, 기초석입니까
같은 그리스도가 어떤 사람에게는 걸림돌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인생을 세우는 기초석이 됩니다. 그 차이는 그리스도에게 있지 않고, 그분 앞에서 내가 무엇을 의지하느냐에 있습니다.
내 행위, 내 열심, 내 종교적 경력을 의지하는 사람에게 십자가는 걸림돌입니다. 그러나 빈손으로 그분을 믿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 반석입니다.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Big Picture · 큰 그림
9–11장, 이스라엘에 관한 세 장의 흐름
9장만 떼어 읽으면 오해하기 쉽습니다. 세 장을 함께 보십시오
장
강조점
핵심 구절
9장
하나님의 주권 — 하나님의 말씀은 실패하지 않았다. 구원은 긍휼에 달려 있다
9:6, 16
10장
사람의 책임 — 이스라엘은 자기 의를 세우려다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받는다
10:3, 13
11장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소망 —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 남은 자가 있고, 결국 온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다
11:1, 26, 29
9장은 하나님의 주권을, 10장은 사람의 책임을, 11장은 하나님의 최종적인 긍휼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이 셋을 모순으로 보지 않고 함께 붙듭니다. 그리고 세 장 전체는 11:33-36의 찬송으로 끝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Glossary · 단어 사전
9장 어려운 단어 사전
옛 한자어와 원어를 오늘의 말로 풀었습니다
저주ἀνάθεμα · 3절
하나님께 바쳐져 멸망에 넘겨지는 것.
골육骨肉 · 3절
뼈와 살, 곧 혈육. 같은 민족, 친척.
양자 됨養子 · 4절
하나님의 아들로 세움받음. 원래 이스라엘의 특권.
폐하여지다廢 · 6절
여기서는 '떨어져 실패하다'.
약속의 자녀8절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으로 태어난 자녀.
택하심擇 · 11절
하나님의 선택.
미워하다13절
히브리식 비교 표현. 덜 사랑하다, 택하지 않다.
긍휼矜恤 · 15–16절
불쌍히 여겨 은혜를 베풂.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주시는 자비.
강퍅剛愎 · 18절
마음이 굳고 고집스러움.
힐문詰問 · 20절
따져 물음, 말대꾸.
토기장이21절
진흙으로 그릇을 빚는 사람. 하나님의 주권의 비유.
관용寬容 · 22절
너그럽게 참아 줌.
남은 자27절
심판 중에도 하나님께서 보존하시는 무리.
만군의 주萬軍 · 29절
하늘 군대의 주, 전능하신 하나님.
거치는 돌33절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 믿지 않는 자에게 그리스도.
For Reflection · 묵상과 나눔
묵상과 나눔을 위한 질문
바울처럼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는 가족이나 친구를 위해 '그치지 않는 고통'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 그들의 이름을 떠올려 보십시오. (2-3절)
나는 '육신의 자녀'(교회 집안, 오랜 신앙 경력)가 아니라 '약속의 자녀'로서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까? (8절)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이 말씀이 나에게 위로입니까, 불편함입니까? (16절)
하나님께 따지고 싶은 일이 있습니까? 토기장이 비유는 그 마음에 어떤 말을 건넵니까? (20-21절)
나도 한때 '내 백성이 아니던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이야기를 나누어 보십시오. (25-26절)
나는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내 행위입니까, 그리스도입니까? (3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