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 고로 그가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JUDGES 1:19
기독교한국침례회 은혜교회 · 담임목사 박동준
Introduction · 들어가며
1장 들어가며
사사기의 첫 장은 승리의 보고서처럼 시작해서, 실패의 목록으로 끝납니다
사사기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여호수아서가 “모세가 죽은 후에”(수 1:1)로 시작했던 것과 똑같은 모양입니다. 큰 지도자 한 사람이 떠난 뒤,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모세 뒤에는 여호수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뒤에는 그런 한 사람의 후계자가 없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지파별로, 각자의 땅에서, 각자 하나님께 순종해야 했습니다.
1장의 흐름은 아주 분명한 내리막길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 묻고(1절), 하나님이 대답하시고(2절), 유다가 순종해서 큰 승리를 거둡니다(4–20절). 그런데 19절부터 “쫓아내지 못하였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21절 베냐민, 27절 므낫세, 29절 에브라임, 30절 스불론, 31절 아셀, 33절 납달리로 이어지면서 점점 심해집니다. 처음에는 가나안 사람이 이스라엘 가운데 살았는데(29절), 나중에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사람 가운데 삽니다(32절). 마지막 단 지파는 아예 산지로 쫓겨 들어갑니다(34절).
이 장은 전쟁 기록이지만, 사실은 마음의 기록입니다. 2장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그 이유를 밝혀 줍니다.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2:2). 1장은 그 판결문 앞에 놓인 증거 목록입니다. 땅을 끝까지 차지하지 못한 것은 철병거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는 대신 일을 시키는 편이 이익이 되었고(28절), 함께 사는 편이 편했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전체의 비극은 이 “적당한 타협”에서 싹이 틉니다.
핵심 구절
1:19
“여호와께서 함께 하신 고로… 그러나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하나님이 함께하셨는데 왜 못 했을까. 사사기 전체를 여는 질문입니다.
되풀이되는 말
“쫓아내지 못하였다”
19, 21, 27, 29, 30, 31, 33절. 일곱 번 가까이 되풀이되며 이스라엘의 실패를 쌓아 올립니다.
거울 같은 인물
아도니 베섹
자기가 한 대로 되돌려 받은 가나안 왕. 이스라엘도 똑같은 원리 아래 있다는 경고가 됩니다.
밝은 장면
갈렙·옷니엘·악사
어두운 장 한가운데 놓인 믿음의 가정. 첫 사사 옷니엘이 여기서 처음 등장합니다.
Reading Guide · 읽기 안내
이 장을 읽기 전에
본문은 저작권이 만료된 『개역한글』입니다. 『개역개정』과 다른 표현은 노트에서 짚었습니다. 노트는 눌러서 펼치거나 위 메뉴의 "노트 모두 펼치기"로 한 번에 열 수 있습니다.
번역상 짚어 둘 곳
무엇을 알아야 하나
1절 “묻자와”
물어서. 히브리어 샤알, 제사장의 우림과 둠밈 등으로 하나님의 뜻을 여쭙던 일.
2절 “붙였노라”
넘겨주었다. 이미 이루어진 일처럼 말하는 완료형.
3절 “제비 뽑아 얻은 땅”
여호수아 때 제비로 나누어 받은 몫(고랄), 곧 기업의 땅.
6절 “수족의 엄지가락”
손과 발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
9절 “남방”
유다 남쪽의 마른 땅 네게브. “평지”는 서쪽 구릉지대 세벨라.
16절 “종려나무 성읍”
여리고(신 34:3).
17절 “진멸”
헤렘. 하나님께 완전히 바쳐 없애는 것. 호르마는 ‘진멸’이라는 뜻의 지명.
27절 “향리”
鄕里, 원문 ‘딸들’. 큰 성에 딸린 작은 마을들.
27절 “결심하고”
작정하고, 고집스럽게 버티며. 원문 야알 ‘마음먹다’.
28절 “사역”
使役, 원문 마스. 나라가 부리는 강제 노역.
36절 “지계”
地界, 땅의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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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누가 먼저 올라가리이까 — 하나님께 묻고 시작한 첫 싸움
사사기의 첫 장면은 아주 좋은 출발입니다. 이스라엘은 지도자를 잃었지만 우왕좌왕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분명히 대답하십니다. “유다가 올라갈찌니라.”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승리를 주십니다.
그런데 이 첫 단락에는 이상하게 긴 이야기가 하나 들어 있습니다. 아도니 베섹이라는 가나안 왕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 이야기입니다. 왜 이런 잔인한 장면이 사사기의 맨 앞에 놓였을까요? 이 왕의 고백 “하나님이 나의 행한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가 사사기 전체를 꿰는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1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리이까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직역 여호수아의 죽음 후에 일이 이러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물어 말하였다. “우리 가운데 누가 가나안 사람에게로, 그와 싸우러, 처음에 올라가겠습니까?”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 짧은 말 안에 사사기 전체의 긴장이 들어 있습니다. 모세가 죽었을 때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죽었을 때는 아무도 그 자리를 이어받지 않습니다. 여호수아도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한 사람의 지도자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야 했습니다. 사사기는 그 시험을 이스라엘이 어떻게 치렀는지 보여 주는 책입니다.
그리고 첫 반응은 훌륭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지도자가 없으니 각자 의견을 내세울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먼저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아마 대제사장 비느하스(20:28)를 통해 우림과 둠밈으로 여쭈었을 것입니다(민 27:21). 신앙의 첫걸음은 언제나 ‘무엇을 할까’보다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사기의 마지막 부분에도 똑같은 질문이 나옵니다. 20:18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처음에는 가나안 사람과 싸우려고 물었는데, 마지막에는 형제 지파와 싸우려고 묻습니다. 사사기는 같은 질문으로 시작해서 같은 질문으로 끝나며, 그 사이에 이스라엘이 얼마나 무너졌는지를 보여 줍니다.
원어 · 번역 노트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 원문 ‘바예히 아하레 모트 예호슈아’. 여호수아서 1:1 ‘바예히 아하레 모트 모셰’(모세가 죽은 후에)와 똑같은 구조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책과 책을 이어 줍니다.
시간 순서 — 2:6–9은 여호수아의 죽음을 다시 말합니다. 그래서 1장의 일부(예를 들어 10–15절 헤브론과 드빌 정복)는 여호수아가 살아 있을 때 일을 다시 정리한 것으로 보는 학자가 많습니다(수 15:13–19과 거의 같은 내용). 1장은 엄격한 연대기라기보다 ‘여호수아 이후 이스라엘의 정복 상황’을 지파별로 정리한 보고서입니다.
묻자와샤알 — ‘묻다, 구하다’. 사울(샤울)이라는 이름이 이 말에서 왔습니다(‘구한 바 된 자’). 사사기에서 하나님께 묻는 장면은 처음(1:1)과 끝(20:18, 23, 27)에만 나옵니다.
함께 읽을 말씀
수 1:1-2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수 24:29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일백 십세에 죽으매
민 27:21그는 제사장 엘르아살 앞에 설 것이요 엘르아살은 그를 위하여 우림의 판결법으로 여호와 앞에 물을 것이며
삿 20:18이스라엘 자손이 일어나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잠 3:5-6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2유다가 올라갈찌니라 —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올라갈찌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 하시니라
직역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유다가 올라갈 것이다. 보라, 내가 그 땅을 그의 손에 주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대답하십니다. “유다가 올라갈찌니라.” 왜 유다일까요? 유다는 가장 큰 지파였고, 남쪽 넓은 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더 깊은 이유가 있습니다. 야곱은 죽기 전에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창 49:10). 유다는 왕이 날 지파, 앞장서서 이끌 지파였습니다. 다윗이 이 지파에서 났고, 마침내 “유대 지파의 사자”(계 5:5)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지파에서 오셨습니다. 사사기의 첫 장면에서 유다가 앞장서는 것은, 이 책이 결국 유다에서 날 왕을 기다리게 하는 책이라는 암시입니다.
그리고 약속이 따릅니다. “보라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 아직 싸움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은 ‘이미 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어 완료형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너무 확실해서 미래의 일도 과거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이미 주셨다’고 하신 것을 붙들고 일어나 올라가는 것입니다.
사사기 20:18에서 이스라엘이 베냐민과 싸우려고 물을 때도 하나님은 “유다가 먼저 갈찌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때는 ‘내가 붙였노라’는 약속이 없습니다. 그리고 첫 싸움에서 이스라엘은 크게 집니다. 같은 대답, 다른 결말. 하나님이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입니다.
원어 · 번역 노트
붙였노라나타티 — ‘주다(나탄)’의 완료형. 성경에서 ‘예언적 완료’라고 부르는 용법입니다. 수 6:2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삿 3:28, 4:7, 7:9에도 같은 약속이 되풀이됩니다.
유다 — 레아가 낳은 넷째 아들. 이름의 뜻은 ‘찬송하다’(창 29:35). 광야에서 유다 지파는 늘 진영의 맨 앞, 동쪽에 섰고 행군할 때도 가장 먼저 출발했습니다(민 2:3, 9; 10:14).
함께 읽을 말씀
창 49:8-10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찌라…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민 10:14수두로 유다 자손 진 기에 속한 자들이 그 군대대로 진행하였으니
삿 20:18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먼저일찌니라
계 5:5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히 11:1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3유다가 형제 시므온에게 — 함께 올라가자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나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너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직역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말하였다. “나와 함께 나의 몫으로 올라가자. 우리가 가나안 사람과 싸우자. 그러면 나도 너와 함께 너의 몫으로 가겠다.” 그래서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갔다.
하나님은 ‘유다’에게 올라가라고 하셨는데, 유다는 형제 시므온에게 함께 가자고 합니다. 이것을 두고 해석이 갈립니다. 하나님이 유다만 부르셨는데 사람의 힘을 더 의지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고, 형제끼리 서로 돕는 아름다운 협력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시므온은 레아가 낳은 아들로 유다의 친형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19:1, 9을 보면 시므온 지파의 땅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유다 땅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유다 자손의 분깃이 너무 많으므로 시므온 자손이 자기의 기업을 그들의 기업 중에서 얻었음이더라.” 그러니 두 지파는 이웃이자 한 지붕 아래 사는 형제였습니다. 유다가 시므온과 함께 싸운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17절에서 유다는 약속대로 시므온의 땅에 가서 함께 싸웁니다.
야곱은 죽기 전 시므온과 레위에 대해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창 49:7)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시므온은 나중에 유다 안에 흡수되어 거의 사라지다시피 합니다. 그러나 사사기 1장에서는 유다의 형제로 함께 싸우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약한 형제를 끌어안고 함께 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방식입니다.
원어 · 번역 노트
제비 뽑아 얻은 땅고랄 — ‘제비’. 여호수아는 실로에서 제비를 뽑아 땅을 나누었습니다(수 18:6–10). 땅은 사람이 차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누어 주신 몫이었습니다. 시 16:5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시므온과 유다 — 수 19:1–9에 시므온의 성읍 목록이 있는데, 그 가운데 상당수가 수 15장 유다의 성읍 목록과 겹칩니다(브엘세바, 호르마, 시글락 등).
함께 읽을 말씀
수 19:1, 9시므온 자손의 이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 취하였으니… 유다 자손의 분깃이 자기들에게 너무 많으므로
창 49:5-7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전 4:9-10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시 133:1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4유다가 올라가매 — 베섹에서 일만 명을 죽이고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그들의 손에 붙이신지라 그들이 베섹에서 일만명을 죽이고
직역 유다가 올라갔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그들의 손에 주셨다. 그들이 베섹에서 그들을 쳤으니 일만 명이었다.
유다가 순종해서 올라가자,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일하십니다. 주목할 것은 문장의 주어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손에 붙이신지라.” 칼을 든 것은 유다였지만, 승리를 주신 분은 여호와였습니다. 사사기는 처음부터 이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이스라엘의 승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 가나안 땅에는 여러 족속이 섞여 살았습니다. 성경은 흔히 일곱 족속을 꼽습니다(신 7:1). 가나안 사람은 주로 평지와 해안의 성읍에, 브리스 사람은 성벽 없는 시골 마을에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브리스’는 ‘성벽 없는 마을’을 뜻하는 말과 소리가 비슷합니다). 성읍 사람과 시골 사람, 곧 그 지역 전체를 이겼다는 뜻입니다.
“일만 명.” 고대의 전쟁 기록에서 숫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쓰일 때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엘레프’(천)는 숫자 ‘천’이기도 하지만 ‘씨족, 부대’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어떻게 읽든 핵심은 같습니다. 큰 승리였고, 하나님이 주신 승리였습니다.
원어 · 번역 노트
브리스 사람 — 창 13:7, 34:30, 수 17:15. ‘페리지’라는 이름은 ‘성벽 없는 마을(페라조트)’과 관련 있다고 보는 학자가 많습니다(에 9:19 “성이 없는 고을”, 겔 38:11).
베섹 — 삼상 11:8에서 사울이 군대를 모은 곳도 ‘베섹’입니다. 그곳은 요단 서편, 세겜과 벧산 사이로 보입니다. 다만 유다 지파의 싸움 장소로는 너무 북쪽이어서, 사사기 1장의 베섹은 다른 곳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신 7:1-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수 17:15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찐대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시 44:3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5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 싸우다
또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서 그와 싸워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죽이니
직역 그들이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 그와 싸웠고,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쳤다.
“아도니 베섹.” ‘아도니’는 ‘나의 주’, ‘베섹’은 지명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이름이라기보다 ‘베섹의 주인’이라는 칭호입니다. 여호수아 10:1의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의의 주)과 이름이 비슷해서 같은 사람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대부분은 다른 인물로 봅니다.
4절이 전투 전체를 요약했다면, 5절은 그 싸움의 중심인물을 끄집어냅니다. 이제 이야기는 한 사람, 가나안 왕 아도니 베섹에게 카메라를 고정합니다. 성경은 수많은 전사자보다 이 한 사람의 운명에 관심을 둡니다. 그의 운명 안에 하나님의 공의가 어떻게 일하는지 보여 줄 교훈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원어 · 번역 노트
아도니아돈 — ‘주인, 주’. 여기에 ‘나의’를 뜻하는 어미가 붙었습니다. 하나님을 부를 때 쓰는 ‘아도나이’와 같은 뿌리입니다. 가나안 왕들은 이런 칭호를 즐겨 썼습니다.
아도니세덱과의 관계 — 수 10:1–27의 아도니세덱은 막게다 굴에서 붙잡혀 처형되었습니다. 사사기 1:7의 아도니 베섹은 예루살렘으로 끌려가 거기서 죽습니다. 두 사람 모두 예루살렘과 연결되어 있어 같은 인물이라는 주장이 나오지만, 이야기의 내용이 달라 따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함께 읽을 말씀
수 10:1여호수아가 아이를 취하여 진멸하되…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이 듣고
시 2:2-4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6아도니 베섹을 잡아 엄지가락을 끊다
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끊으매
직역 아도니 베섹이 도망쳤다. 그들이 그를 뒤쫓아 잡아서 그의 손과 발의 엄지들을 잘랐다.
아도니 베섹은 도망치다 붙잡힙니다. 그리고 유다 사람들은 그의 손과 발의 엄지를 자릅니다. 오늘 우리가 읽기에는 너무 잔인한 장면입니다. 왜 이렇게 했을까요?
고대 근동에서 이것은 패한 적의 왕이나 장수에게 하던 관습이었습니다. 엄지손가락이 없으면 칼이나 활을 제대로 잡을 수 없습니다. 엄지발가락이 없으면 몸의 균형을 잡지 못해 전차를 타거나 빨리 달릴 수 없습니다. 죽이지는 않되, 다시는 전사로 일어서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모욕이었습니다. 한때 칠십 왕을 거느렸던 자가 이제 남의 상 아래서 기어 다니는 신세가 됩니다.
성경은 이 행동을 칭찬하지도 꾸짖지도 않고 그냥 기록합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일이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7절에서 아도니 베섹 자신의 입을 통해 이 일의 의미가 밝혀집니다. 그가 남에게 한 일이 그에게 되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원어 · 번역 노트
엄지가락보헨 — 손과 발의 엄지. 제사장을 위임할 때 피를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발랐던 그 부위입니다(출 29:20, 레 8:23–24). 거기서 엄지는 ‘하나님을 섬기는 손과 발’ 전체를 상징했습니다. 여기서는 ‘싸우는 손과 발’ 전체를 빼앗는 것을 뜻합니다.
신체 훼손 관습 — 고대 앗수르와 그리스 기록에도 포로의 엄지를 자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테네 사람들이 아이기나 섬 사람들의 엄지를 잘라 다시 노를 젓거나 창을 들지 못하게 했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함께 읽을 말씀
레 8:23-24그 피를 취하여 아론의 오른 귓부리와 오른손 엄지가락과 오른발 엄지가락에 바르고
삼상 11:2내가 너희 오른눈을 다 빼어야 너희와 언약하리라 내가 온 이스라엘을 이같이 모욕하리라
7하나님이 나의 행한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아도니 베섹이 가로되 옛적에 칠십 왕이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찍히고 내 상 아래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나의 행한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
직역 아도니 베섹이 말하였다. “칠십 명의 왕이 손과 발의 엄지가 잘린 채 내 상 아래서 주워 먹었다. 내가 행한 그대로 하나님이 내게 갚으셨다.” 그들이 그를 예루살렘으로 데려갔고, 그는 거기서 죽었다.
아도니 베섹의 고백은 놀랍습니다. 그는 한때 칠십 명의 왕을 정복해서 엄지를 자르고, 자기 식탁 아래서 개처럼 부스러기를 주워 먹게 했습니다. 이제 그가 똑같은 일을 당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우연이나 운명으로 돌리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행한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이방 왕의 입에서 나온 이 고백이 사사기 전체의 열쇠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셔서 사람이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갈 6:7). 이 원리는 가나안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사기 9장에서 아비멜렉은 형제 칠십 명을 한 돌 위에서 죽였는데, 결국 한 여인이 던진 맷돌에 머리가 깨져 죽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비멜렉이 그 형제 칠십인을 죽여 자기 아비에게 행한 악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9:56). 칠십이라는 숫자까지 똑같습니다.
그러니 아도니 베섹은 이스라엘을 위한 거울입니다. 가나안 사람이 악을 행해서 땅을 빼앗기듯, 이스라엘도 가나안 사람처럼 살면 똑같은 일을 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사기는 실제로 그렇게 진행됩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면 하나님은 그들을 원수의 손에 “붙이십니다”(2:14). 1:2, 4에서 가나안을 이스라엘 손에 붙이셨던 바로 그 말입니다.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 한때 왕이었던 자가 끌려가 초라하게 죽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8절에 예루살렘이 나오는 것이 우연이 아닙니다. 아마 예루살렘은 아도니 베섹과 동맹을 맺은 성읍이었고, 유다는 붙잡은 왕을 앞세워 그 성으로 쳐들어갔을 것입니다.
원어 · 번역 노트
상 아래서 먹을 것을 줍다 — 개처럼 상 밑에 떨어진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모습. 마 15:27 수로보니게 여인의 말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눅 16:21 나사로를 떠올리게 합니다. 반대로 므비보셋은 다리를 저는 몸이었지만 다윗의 상에서 ‘왕자처럼’ 먹었습니다(삼하 9:11).
칠십 — 성경에서 칠십은 ‘완전하고 큰 무리’를 나타내는 수입니다. 야곱의 가족 칠십 명(창 46:27), 칠십 장로(출 24:1), 기드온의 아들 칠십(삿 8:30), 압돈의 자손 칠십(12:14).
하나님 — 아도니 베섹은 ‘여호와’라는 이름 대신 일반적인 ‘하나님(엘로힘)’을 씁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알고 섬겼다는 뜻이라기보다, 신적인 공의가 자기에게 임했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함께 읽을 말씀
갈 6:7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삿 9:56아비멜렉이 그 형제 칠십인을 죽여 자기 아비에게 행한 악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
출 21:23-25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마 7:2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옵 1:15너의 행한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너의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TODAY'S MESSAGE · 오늘의 메시지
하나님께 묻고 시작하는 사람
사사기의 첫 장면은 앞으로 펼쳐질 모든 이야기의 기준이 됩니다. 하나님께 묻고, 대답을 듣고, 그 말씀대로 올라가는 사람은 이깁니다. 이스라엘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은 이 순서가 깨질 때부터입니다. 사사기 후반부에서 사람들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합니다(17:6, 21:25).
또 하나, 아도니 베섹의 고백은 우리에게도 울립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다. 우리가 남에게 한 대로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그러나 복음은 여기서 한 걸음 더 갑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갚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분의 손과 발에 못이 박혔기에, 우리는 상 아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식탁에서 자녀로 먹습니다.
1:8–15유다의 승리, 그리고 갈렙의 가정 — 첫 사사 옷니엘과 샘물을 구한 악사
유다의 정복은 계속됩니다. 예루살렘을 치고(8절), 산지와 남방과 평지로 내려가고(9절), 헤브론(10절)과 드빌(11절)을 칩니다. 이 단락의 대부분은 여호수아 15:13–19과 거의 같은 내용입니다. 사사기 기자는 여호수아 때의 이야기를 다시 가져와, 유다의 승리 이야기 한가운데에 믿음의 한 가정을 세워 둡니다.
갈렙과 그의 사위 옷니엘, 그리고 딸 악사입니다. 옷니엘은 3장에서 첫 번째 사사로 등장할 사람입니다. 사사기 기자는 첫 사사를 소개하기 전에, 그가 어떤 가정에서 어떤 믿음을 배웠는지 먼저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 짧은 이야기는 사사기 마지막 부분의 여인들 이야기(19–21장)와 정반대의 그림을 그립니다.
8유다 자손이 예루살렘을 쳐서 취하고 성을 불살랐다
유다 자손이 예루살렘을 쳐서 취하여 칼날로 치고 성을 불살랐으며
직역 유다 자손이 예루살렘을 쳐서 그것을 점령하였고, 그것을 칼날로 쳤으며, 그 성을 불에 보냈다.
유다 자손은 예루살렘을 쳐서 불사릅니다. 그런데 21절에서는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한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에 거하더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것은 이로부터 수백 년 뒤입니다(삼하 5:6–9). 어떻게 된 일일까요?
가장 자연스러운 설명은 이렇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다와 베냐민의 경계에 있었습니다(수 15:8, 18:16). 유다는 성을 쳐서 불살랐지만 그곳에 머물러 지키지 않았고, 여부스 사람이 곧 다시 돌아와 성을 재건했습니다. 특히 남쪽 언덕의 견고한 요새(나중의 ‘시온 산성’)는 끝까지 함락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성을 ‘치는 것’과 땅을 ‘차지하는 것’은 다릅니다. 이 차이가 사사기 1장 전체의 주제입니다.
사사기 19장에서 레위인은 해가 질 무렵 여부스(예루살렘) 앞을 지나면서 “이방인의 성읍”이라 들어가지 않겠다고 합니다(19:12). 그리고 이스라엘 성읍 기브아에서 끔찍한 일을 당합니다. 사사기 기자는 예루살렘을 처음과 끝에 두어, 이방인의 성이 안전하고 이스라엘의 성이 위험해진 뒤집힌 세상을 보여 줍니다.
원어 · 번역 노트
칼날로레피 하레브 — 직역하면 ‘칼의 입으로’. 칼이 사람을 삼킨다는 그림 언어입니다. 성경에서 전멸이나 철저한 공격을 말할 때 쓰는 관용구입니다(수 6:21, 삿 1:25, 4:16).
예루살렘의 이름 — 여호수아·사사기 시대에는 ‘여부스’로도 불렸습니다(수 18:28, 삿 19:10). 기원전 14세기 이집트 아마르나 서신에는 ‘우루살림’이라는 이름이 이미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만난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었습니다(창 14:18).
다윗의 정복 — 삼하 5:6–9. 여부스 사람들은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치리라”고 장담할 만큼 성이 견고하다고 믿었습니다.
함께 읽을 말씀
수 15:63예루살렘 거민 여부스 사람을 유다 자손이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이 오늘날까지 유다 자손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하니라
삿 1:21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한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삼하 5:6-7왕과 그 종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 거민 여부스 사람을 치려 하매…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성이더라
삿 19:10-12우리가 돌이켜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하지 아니한 외인의 성읍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니 기브아로 나아가리라
9산지와 남방과 평지에 거한 가나안 사람과 싸웠다
그 후에 유다 자손이 내려가서 산지와 남방과 평지에 거한 가나안 사람과 싸웠고
직역 그 후에 유다 자손이 내려가서 산지와 네게브와 셰펠라에 사는 가나안 사람과 싸웠다.
9절은 유다가 싸운 지역을 세 가지로 요약합니다. 이 세 지역은 유다 땅 전체를 가리키는 지리 용어입니다. 산지는 예루살렘에서 헤브론으로 이어지는 중앙 산등성이, 남방(네게브)은 브엘세바 주변의 건조한 남쪽 땅, 평지(셰펠라)는 서쪽 블레셋 해안 평야로 내려가는 낮은 구릉지대입니다.
이 세 지역의 지형은 아주 다릅니다. 산지는 좁고 가파른 길이 많아 전차가 다니기 어렵고, 해안 평야와 넓은 골짜기는 전차가 마음껏 달릴 수 있는 곳입니다. 19절에서 유다가 “산지 거민은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쫓아내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도 이 지형과 관련이 있습니다.
원어 · 번역 노트
네게브 — 원래 ‘마른 땅’이라는 뜻이고, 그래서 ‘남쪽’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15절에서 악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으로 보내시니 샘물도 주소서” 한 것도 이 땅이 물이 귀했기 때문입니다.
셰펠라 — ‘낮다(샤펠)’에서 온 말. 『개역한글』은 ‘평지’로, 『개역개정』도 ‘평지’로 옮겼습니다. 실제로는 평평한 들판이 아니라 낮은 언덕들이 이어진 지대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이 싸운 엘라 골짜기가 이곳에 있습니다.
함께 읽을 말씀
수 10:40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온 땅 곧 산지와 남방과 평지와 경사지와 그 모든 왕을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수 15:21, 33, 48유다 자손의 지파의 남으로 에돔 경계에 접근한 성읍들은… 평지에는… 산지는
10헤브론을 쳐서 아낙의 세 아들을 죽이다
유다가 또 가서 헤브론에 거한 가나안 사람을 쳐서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죽였더라 헤브론의 본 이름은 기럇 아르바이었더라
직역 유다가 헤브론에 사는 가나안 사람에게로 가서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쳤다. 헤브론의 이름은 전에 기럇 아르바였다.
헤브론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아주 특별한 곳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장사하려고 막벨라 굴을 산 곳이고(창 23장), 아브라함·이삭·야곱이 모두 이곳에 묻혔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서 이스라엘 조상들이 처음으로 ‘소유’한 땅이 바로 헤브론의 무덤이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다윗이 처음 왕이 된 곳도 헤브론입니다(삼하 2:1–4).
그곳에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이름들이 낯익지 않습니까? 40년 전 모세가 보낸 열두 정탐꾼이 헤브론에서 바로 이 세 사람을 보았습니다(민 13:22). 그리고 열 명의 정탐꾼은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라고 하며 백성의 마음을 녹였습니다(민 13:33). 그 두려움 때문에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을 헤맸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거인들이 쓰러집니다. 40년 전에는 불가능해 보였던 일이, 믿음으로 올라가니 이루어졌습니다. 20절은 이 일을 한 사람이 갈렙이라고 밝힙니다. 열 명이 두려워할 때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민 13:30)고 외쳤던 그 사람입니다.
원어 · 번역 노트
기럇 아르바 — 수 14:15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라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 아르바는 아낙의 조상 이름이자, 히브리어로 ‘넷’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넷의 성’, 곧 네 마을이 연합한 성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아낙 자손 — 키가 큰 족속. 신 9:2 “누가 아낙 자손을 능히 당하리요.” 이들 중 일부는 블레셋 땅 가사, 가드, 아스돗에 남았습니다(수 11:22). 골리앗이 가드 사람이었던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여호수아서와의 관계 — 수 15:13–14은 이 일을 갈렙이 직접 한 것으로 기록합니다. 사사기는 유다 지파 전체의 승리로 묶어 말하고, 20절에서 다시 갈렙의 이름을 밝힙니다.
함께 읽을 말씀
민 13:22, 33헤브론에 이르렀으니 헤브론은 애굽 소안보다 칠년 전에 세운 곳이라 그곳에 아낙 자손 아히만과 세새와 달매가 있었더라…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민 13:30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시켜 가로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수 14:12-14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창 23:19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 (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11드빌의 거민들을 치다 — 본 이름은 기럇 세벨
거기서 나아가서 드빌의 거민들을 쳤으니 드빌의 본 이름은 기럇 세벨이라
직역 거기서 그가 드빌의 주민들에게로 갔다. 드빌의 이름은 전에 기럇 세벨이었다.
헤브론에서 유다는 남서쪽으로 나아가 드빌을 칩니다. 이 성의 옛 이름은 “기럇 세벨”, 곧 ‘책의 성’입니다. 히브리어 ‘세페르’는 ‘책, 문서’를 뜻합니다. 아마 그 지역의 기록 보관소나 서기관들이 있던 성읍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여호수아 15:49은 또 다른 이름 “기럇 산나”를 소개합니다.
이 작은 성읍이 다음 이야기의 무대가 됩니다. 갈렙은 이 성을 차지하는 사람에게 자기 딸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원어 · 번역 노트
드빌 — ‘뒤쪽, 안쪽’이라는 뜻과 관련이 있는 이름입니다. 같은 철자가 성전의 ‘지성소’(드비르, 왕상 6:5)를 가리킬 때도 쓰입니다.
여호수아서와의 비교 — 수 10:38–39에서 여호수아가 드빌을 쳤다고 하고, 수 15:15–17에서는 옷니엘이 취했다고 합니다. 처음 정복 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들어와 살았기 때문에 두 번 쳐야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나안 정복은 한 번에 끝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함께 읽을 말씀
수 15:15-16거기서 올라가서 드빌 거민을 쳤는데 드빌의 본 이름은 기럇 세벨이라
수 10:38-39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로 더불어 돌아와서 드빌에 이르러 싸워
12갈렙의 약속 — 기럇 세벨을 취하는 자에게 딸 악사를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취하는 자에게는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
직역 갈렙이 말하였다.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점령하는 사람에게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겠다.”
갈렙은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년을 보여 주는 사람입니다. 여호수아 14장에서 그는 85세의 나이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는 쉬운 땅이 아니라 거인들이 사는 산지를 달라고 했습니다. 45년을 기다린 약속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헤브론 근처의 마지막 남은 성 기럇 세벨을 앞에 두고, 이 성을 차지하는 사람에게 자기 딸 악사를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오늘 우리 눈에는 딸을 상품처럼 내건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 사회에서 이것은 사위를 고르는 방식이었습니다. 갈렙은 재산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용기와 믿음이 있는 사람을 사위로 원했습니다. 사울도 골리앗을 죽이는 자에게 딸을 주겠다고 했고(삼상 17:25), 다윗이 그 사위가 되었습니다(삼상 18:27).
사사기의 마지막 장면과 비교해 보면 이 장면의 의미가 더 분명해집니다. 사사기 21장에서 베냐민 남자들은 실로의 춤추는 딸들을 강제로 붙잡아 아내로 삼습니다. 처음에는 믿음의 용사가 존중받으며 아내를 얻었는데, 마지막에는 여인들이 납치됩니다. 사사기는 이렇게 가정의 모습을 통해 한 사회가 얼마나 무너졌는지 보여 줍니다.
원어 · 번역 노트
갈렙 — 이름은 ‘개’(켈레브)와 같은 소리로, 충성스러움을 뜻한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는 원래 그나스 사람(수 14:6), 곧 에돔과 관련된 이방 계열 출신으로 유다 지파에 들어온 사람으로 보입니다(창 36:11, 42). 이방 출신이 이스라엘에서 가장 충성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악사악사 — ‘발목 장식, 발찌’라는 뜻(사 3:18 “발목 고리”와 같은 말).
함께 읽을 말씀
수 14:10-12팔십 오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수 15:16-17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취하는 자에게는 내가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
삼상 17:25그를 죽이는 사람은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 딸을 그에게 주고
민 14:24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13옷니엘이 그것을 취하고 악사를 아내로 얻다
갈렙의 아우요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그것을 취한고로 갈렙이 그 딸 악사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직역 갈렙의 아우인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그것을 점령하였다. 그래서 갈렙이 그의 딸 악사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다.
그 성을 차지한 사람은 옷니엘이었습니다. 이 이름을 기억해 두십시오. 3장에서 이스라엘이 처음 우상을 섬겨 메소보다미아 왕에게 8년간 압제받을 때, 하나님이 세우신 첫 번째 사사가 바로 이 옷니엘입니다(3:9). 사사기는 첫 사사를 등장시키기 전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미리 보여 줍니다. 그는 갈렙 집안의 사람이었고, 믿음으로 싸워 성을 차지한 용사였습니다.
그는 “갈렙의 아우요 그나스의 아들”입니다. 이 표현은 두 가지로 읽힙니다. 옷니엘이 갈렙의 친동생이라는 뜻일 수도 있고,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곧 갈렙의 조카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어 문장은 둘 다 가능합니다. 조카라면 사촌과 혼인한 셈인데,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습니다. 어느 쪽이든 옷니엘은 갈렙의 믿음을 가까이서 보고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사사기의 중요한 원리가 드러납니다. 믿음은 가정에서 전해집니다. 2:10은 여호수아 세대가 죽은 뒤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세대가 일어났다고 슬퍼합니다. 그러나 갈렙의 집안에서는 믿음의 다음 세대가 일어났습니다. 첫 사사 옷니엘은 사사기 전체에서 흠이 하나도 기록되지 않은 거의 유일한 사사입니다. 그 뒤에 나오는 사사들은 점점 흠이 많아집니다.
원어 · 번역 노트
옷니엘오트니엘 — ‘하나님은 나의 힘’ 또는 ‘하나님의 사자’로 풀이됩니다.
갈렙의 아우 — 원문 ‘아히 칼렙 학카톤 밈멘누’(갈렙의 아우, 그보다 어린). 이 ‘아우’라는 말이 옷니엘을 가리키는지 그나스를 가리키는지 문법적으로 둘 다 가능합니다. 대상 4:13 “그나스의 아들들은 옷니엘과 스라야요”.
옷니엘의 사사 시대 — 3:9–11. 그가 다스린 40년 동안 땅이 평안했습니다. 그의 이야기에는 실패나 죄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함께 읽을 말씀
삿 3:9-11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삿 2:10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신 6:6-7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딤후 1:5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14악사가 아버지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나귀에서 내리매
악사가 출가할 때에 그에게 청하여 자기 아비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나귀에서 내리매 갈렙이 묻되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직역 그녀가 들어갈 때에, 그녀가 그를 부추겨 그녀의 아버지에게 밭을 구하게 하였다. 그녀가 나귀에서 내리자 갈렙이 그녀에게 말하였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이제 이야기는 갑자기 악사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전쟁 이야기 한가운데 놓인 한 여인의 짧은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신랑 옷니엘의 집으로 가는 날, 남편에게 “아버지께 밭을 구하자”고 말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아버지에게 가서 청하는 사람은 악사 자신입니다.
“나귀에서 내리매.” 히브리어 ‘차나흐’는 성경에서 세 번밖에 나오지 않는 드문 말입니다(여기, 수 15:18, 삿 4:21). 존경하는 사람 앞에서 나귀에서 내리는 것은 공손히 청하는 몸짓이었습니다. 아비가일도 다윗 앞에서 나귀에서 급히 내려 엎드렸습니다(삼상 25:23). 아버지 갈렙은 딸의 몸짓만 보고도 무언가 청할 것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묻습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아버지와 딸의 이 짧은 대화는 정말 따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그분의 자녀 사이의 대화를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도 소경 바디매오에게 똑같이 물으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막 10:51).
원어 · 번역 노트
그에게 청하여 — 원문은 ‘그녀가 그(옷니엘)를 부추겨’. 그런데 실제로 아버지에게 말하는 사람은 악사입니다. 그래서 고대 헬라어역(70인역)과 라틴어역(불가타)은 이 부분을 ‘그가 그녀를 부추겨’로 바꾸어 읽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대로라면 악사가 주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내리매차나흐 — 삿 4:21에서는 야엘이 장막 말뚝을 시스라의 관자놀이에 ‘박을’ 때 이 말이 쓰여 ‘꽂히다, 내리찍다’라는 뜻이 됩니다. 정확한 뜻을 두고 ‘손뼉을 쳤다’, ‘탄성을 질렀다’는 해석도 있지만, 대부분은 ‘내렸다’로 봅니다.
함께 읽을 말씀
수 15:18악사가 출가할 때에 그에게 청하여 자기 아비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나귀에서 내리매 갈렙이 그에게 묻되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삼상 25:23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의 앞에 엎드려
막 10:51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15내게 복을 주소서 — 윗샘과 아랫샘을 주다
가로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으로 보내시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더라
직역 그녀가 말하였다. “내게 복을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네게브 땅에 주셨으니, 물의 샘들도 내게 주십시오.” 그러자 갈렙이 윗샘들과 아랫샘들을 그녀에게 주었다.
악사는 담대하게 구합니다. “내게 복을 주소서.” 그녀가 받은 땅은 남방, 곧 네게브였습니다. 네게브는 물이 귀한 마른 땅입니다. 땅만 있고 물이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샘물도 내게 주소서”라고 구합니다. 그녀는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히 알았고, 그것을 줄 수 있는 아버지에게 구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 갈렙은 “윗샘과 아랫샘”을 줍니다. 샘 하나를 구했는데, 위쪽과 아래쪽의 샘을 모두 주었습니다. 구한 것보다 넉넉히 준 것입니다. 실제로 헤브론 남서쪽 키르벳 라부드(드빌로 추정되는 곳) 근처에는 지금도 위아래로 나뉜 샘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 짧은 이야기는 어둡고 피비린내 나는 사사기 1장 한가운데 놓인 한 줄기 맑은 샘물 같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을 믿음으로 차지하는 남편, 그 땅을 살게 할 물을 구하는 아내, 그리고 넉넉하게 주는 아버지.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신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늘 아버지는 갈렙보다 더 좋은 아버지이십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원어 · 번역 노트
복베라카 — 보통 ‘복’으로 옮기지만, 구체적인 ‘선물, 예물’을 뜻하기도 합니다(창 33:11 야곱이 에서에게 준 ‘예물’, 삼상 25:27 아비가일의 ‘예물’).
샘물굴로트 — ‘물웅덩이, 우물, 샘’. 이 단어는 주로 둥근 그릇이나 물이 고인 곳을 가리킵니다(전 12:6 “금 그릇”의 ‘그릇’이 같은 뿌리).
여호수아서와 같은 이야기 — 수 15:16–19과 거의 글자 그대로 같습니다. 사사기 기자는 이 이야기를 일부러 다시 가져와 1장 한가운데 두었습니다.
함께 읽을 말씀
수 15:19가로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 땅으로 보내시오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더라
마 7:7-11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요 4:14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엡 3:20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TODAY'S MESSAGE · 오늘의 메시지
믿음은 가정에서 자라고, 다음 세대로 흘러갑니다
사사기는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2:10)는 슬픈 책입니다. 그런데 그 어두운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은 갈렙의 가정을 보여 주십니다. 85세에도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했던 아버지, 그 믿음을 보고 자라 성을 취한 옷니엘, 그리고 필요한 것을 담대하게 구한 딸 악사.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져도, 믿음의 가정 하나가 다음 시대를 구할 사사를 길러 냅니다. 옷니엘은 갈렙의 집에서 나왔습니다. 우리 가정은 다음 세대에게 어떤 믿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까? 그리고 하늘 아버지께 “내게 복을 주소서, 샘물도 주소서” 하고 구하고 있습니까? 아버지는 윗샘과 아랫샘을 함께 주시는 분입니다.
1:16–21함께 올라간 겐 사람, 그리고 첫 번째 “쫓아내지 못하였다”
이 단락에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16–18절까지는 여전히 승리입니다. 이방인 겐 사람이 유다와 함께 살게 되고, 유다는 시므온과 함께 호르마를 진멸하고, 블레셋 해안의 큰 성읍들까지 취합니다.
그런데 19절에서 처음으로 그늘이 드리워집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 고로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하나님이 함께하셨는데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21절 베냐민에서 다시 “쫓아내지 못하였다”가 나옵니다. 이제부터 이 말이 1장 끝까지 되풀이됩니다.
16모세의 장인 겐 사람의 자손이 유다와 함께 올라가다
모세의 장인은 겐 사람이라 그 자손이 유다 자손과 함께 종려나무 성읍에서 올라가서 아랏 남방의 유다 황무지에 이르러 그 백성 중에 거하니라
직역 모세의 장인인 겐 사람의 자손이 유다 자손과 함께 종려나무 성읍에서 아랏 남쪽에 있는 유다 광야로 올라가서, 가서 그 백성과 함께 살았다.
전쟁 이야기 중간에 뜻밖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모세의 장인 겐 사람의 자손입니다. 모세의 장인은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호밥의 아버지 르우엘)였습니다(출 3:1, 민 10:29). 그 가족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지만 이스라엘과 함께 광야를 지나왔습니다. 모세가 호밥에게 “우리의 눈이 되리이다”(민 10:31) 하고 함께 가자고 청했을 때, 그 가족이 이스라엘과 함께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종려나무 성읍”, 곧 여리고에 머물다가 유다와 함께 남쪽 광야로 올라가 “그 백성 중에 거하니라.”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로 들어와 함께 사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1장 뒷부분과 날카롭게 대비됩니다. 이 이방인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따라 이스라엘 가운데 들어와 살았습니다. 반면 1장 뒷부분의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따르지 않은 채 이스라엘 가운데 남았고, 결국 이스라엘을 우상으로 끌어들입니다. 문제는 ‘누가’ 함께 사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섬기느냐’였습니다.
겐 사람은 사사기에서 다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4장에서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이 가나안 군대 장관 시스라를 죽여 이스라엘을 구합니다(4:11, 17–21). 그리고 훗날 겐 사람에게서 나온 레갑 족속은 예레미야 시대까지 조상의 가르침을 지킨 신실한 사람들로 칭찬받습니다(렘 35장).
원어 · 번역 노트
겐 사람케니 — ‘대장장이’를 뜻하는 아람어·아랍어와 같은 뿌리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금속을 다루며 떠돌던 유목민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창 4:22의 ‘두발가인’(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의 ‘가인’과도 같은 철자입니다.
모세의 장인 — 출애굽기에서는 르우엘(출 2:18)과 이드로(출 3:1)로, 민수기에서는 호밥의 아버지 르우엘(민 10:29)로 나옵니다. 사사기 4:11은 ‘모세의 장인 호밥’이라고 합니다. ‘장인’을 뜻하는 히브리어 ‘호텐’은 처가의 남자 어른을 두루 가리킬 수 있어서 호밥을 처남으로 보기도 합니다.
종려나무 성읍 — 신 34:3, 대하 28:15. 여리고는 오아시스 도시여서 종려나무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사사기 3:13에서 모압 왕 에글론이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합니다. 이스라엘이 저주받은 여리고 터에 다시 자리 잡았다가 빼앗긴 것으로 보입니다.
함께 읽을 말씀
민 10:29-32여호와께서 주마 하신 곳으로 우리가 진행하나니 우리와 동행하자 그리하면 선대하리라… 우리의 눈이 되리이다
삿 4:11, 17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중 겐 사람 헤벨이 자기 족속을 떠나… 시스라가 도보로 도망하여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이르렀으니
삼상 15:6사울이 겐 사람에게 이르되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 내려가라…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너희가 그들을 선대하였느니라
렘 35:18-19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영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17시므온과 함께 스밧을 진멸하고 호르마라 하다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과 함께 가서 스밧에 거한 가나안 사람을 쳐서 그곳을 진멸하였으므로 그 성읍 이름을 호르마라 하니라
직역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과 함께 가서 스밧에 사는 가나안 사람을 쳐서 그것을 진멸하였다. 그래서 그 성의 이름을 호르마라고 불렀다.
3절에서 유다는 시므온에게 “나도 너의 땅에 함께 가리라”고 약속했습니다. 17절에서 유다는 그 약속을 지킵니다. 스밧은 시므온의 땅에 있던 성읍이었습니다(수 19:4). 형제의 약속이 지켜지는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그들은 그 성을 “진멸”합니다. 히브리어 ‘하람’은 단순히 많이 죽였다는 뜻이 아니라, 그 성과 그 안의 것을 하나님께 완전히 바쳐 사람이 손대지 못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읍 이름이 “호르마”, 곧 ‘진멸’이 됩니다.
호르마라는 이름에는 긴 이야기가 있습니다. 40년 전, 가데스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가지 말라 하셨는데도 고집을 부려 올라갔다가 바로 이 근처 호르마까지 쫓겨 패했습니다(민 14:45). 그 뒤 민수기 21:3에서 이스라엘은 아랏 왕을 이기고 그곳을 진멸해 호르마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사기에서 다시 이 이름이 확정됩니다. 불순종으로 패배했던 곳이, 순종으로 승리의 기념비가 되었습니다.
원어 · 번역 노트
진멸헤렘 — 하나님께 완전히 바쳐진 것. 여리고처럼 진멸된 성의 물건은 하나님의 것이어서 사람이 취하면 안 되었습니다(수 6:17–19, 아간의 범죄 수 7장). 오늘날 아랍어의 ‘하람’(금지된, 거룩한)도 같은 뿌리입니다.
호르마 — 민 14:45, 21:1–3, 신 1:44, 수 12:14, 19:4. 정확한 위치는 브엘세바 동쪽의 텔 마소스나 텔 이라 등으로 추정됩니다.
함께 읽을 말씀
민 14:44-45그들이 그래도 산꼭대기로 올라갔고… 아말렉인과 산지에 거하는 가나안인이 내려와 쳐서 파하고 호르마까지 이르렀더라
민 21:2-3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만일 이 백성을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그들의 성읍을 다 멸하리이다… 그곳 이름을 호르마라 하였더라
수 19:4엘돌랏과 브둘과 호르마와
신 7: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18가사와 아스글론과 에그론을 취하다
유다가 또 가사와 그 경내와 아스글론과 그 경내와 에그론과 그 경내를 취하였고
직역 유다가 가사와 그 영토와 아스글론과 그 영토와 에그론과 그 영토를 점령하였다.
유다는 서쪽 해안으로 나아가 가사, 아스글론, 에그론을 취합니다. 이 세 성읍은 나중에 블레셋의 다섯 도시(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가드, 에그론, 수 13:3)에 속하게 되는 곳입니다. 유다의 정복이 남쪽 산지에서 서쪽 해안까지 넓게 퍼졌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질문이 생깁니다. 바로 다음 19절은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다”고 하고, 3장 3절에는 “블레셋 다섯 방백”이 이스라엘을 시험하는 남은 족속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삼손 시대(13–16장)에는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다스립니다. 그렇다면 18절의 정복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 유다는 이 성읍들을 쳐서 한때 차지했지만 오래 지키지 못했을 것입니다. 특히 바다 민족인 블레셋 사람들이 기원전 12세기 무렵 대규모로 이 해안에 정착하면서, 이 도시들은 강력한 블레셋의 성읍이 되었습니다. 고대 헬라어역(70인역)은 아예 이 구절을 “유다가 가사와… 취하지 못하였다”로 읽습니다. 어느 쪽이든, 1장은 승리처럼 보이는 것이 오래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조용히 보여 줍니다.
원어 · 번역 노트
70인역의 읽기 — 70인역은 “유다가 가사와 그 경계와 아스글론과 그 경계와 에그론과 그 경계와 아스돗과 그 주변 땅을 상속하지 못하였다”로 옮깁니다. 문맥(19절)에 맞추려고 고친 것으로 보이며, 대부분의 현대 번역은 히브리어 본문을 따릅니다.
블레셋 — 에게해와 크레타 쪽에서 온 ‘바다 민족’. 이집트 람세스 3세(기원전 12세기 초)의 기록에 ‘펠레셋’으로 나옵니다. ‘팔레스타인’이라는 지명이 이 이름에서 왔습니다.
함께 읽을 말씀
수 13:2-3남은 땅은 이러하니 블레셋 사람의 온 지방과… 가사 사람과 아스돗 사람과 아스글론 사람과 가드 사람과 에그론 사람과
삿 3:3블레셋 다섯 방백과 가나안 모든 사람과 시돈
삿 16:1, 21삼손이 가사에 가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잡아 그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19여호와께서 함께 하셨으나 — 철병거 때문에 쫓아내지 못하였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 고로 그가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직역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다. 그래서 그는 산지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몰아낼 수 없었다. 그들에게 철 전차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사사기 1장의 경첩입니다. 앞부분은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 고로” 승리였습니다. 그런데 뒷부분은 처음으로 “쫓아내지 못하였으며”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철병거”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멈추어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셨는데, 철병거가 하나님보다 강했단 말입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여호수아 17:18에서 여호수아는 요셉 자손에게 분명히 말했습니다. “가나안 족속이 비록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그리고 사사기 4장에서 하나님은 철병거 구백 승을 가진 시스라를 드보라와 바락 앞에서 무너뜨리십니다. 철병거는 하나님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구절은 변명처럼 들립니다. 유다는 산지에서는 이겼습니다. 산지는 전차가 다닐 수 없으니 자기 힘으로도 싸울 만했습니다. 그런데 넓은 평야에서 철병거를 보자,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보다 눈에 보이는 무기를 더 크게 보았습니다. 40년 전 정탐꾼들이 거인을 보고 “우리는 메뚜기 같다”고 했던 것과 같은 마음입니다. 사사기 기자는 “여호와께서 함께 하셨다”와 “쫓아내지 못하였다”를 한 문장 안에 나란히 둠으로써, 문제가 하나님께 있지 않고 이스라엘의 믿음에 있었음을 넌지시 보여 줍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철병거’가 있습니다. 산지 같은 작은 문제에서는 하나님을 의지하다가, 정말 큰 장벽 앞에서는 “이건 현실적으로 안 돼”라고 물러서는 자리. 하나님이 함께하시는데도 우리가 ‘쫓아내지 못하는’ 영역이 바로 그곳입니다.
원어 · 번역 노트
쫓아내다야라쉬 (히필형 호리쉬) — 기본 뜻은 ‘상속하다, 차지하다’이고, 사역형에서는 ‘(원주민을) 몰아내고 차지하다’가 됩니다. 1장에서 열 번 넘게 나오는 이 장의 열쇠 말입니다.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 원문은 ‘키 로 레호리쉬’, 직역하면 ‘몰아내는 것이 아니었다’ 또는 ‘몰아낼 수 없었다’. 능력이 없었다는 뜻인지 하지 않았다는 뜻인지 문법만으로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수 17:18과 사사기 전체의 흐름은 ‘하지 않은 것’에 무게를 둡니다.
철병거 — 전차 전체가 철로 된 것이 아니라 바퀴나 차체를 철로 보강한 전차로 봅니다. 사사 시대는 청동기에서 철기로 넘어가는 시기였고, 철을 다루는 기술은 가나안과 블레셋이 먼저 갖고 있었습니다(삼상 13:19–22).
함께 읽을 말씀
수 17:16-18골짜기 땅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에게는… 다 철병거가 있나이다… 가나안 사람이 비록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찌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삿 4:3, 13-15야빈왕은 철병거 구백승이 있어서… 여호와께서 바락의 앞에서 시스라와 그 모든 병거와 그 온 군대를 칼날로
시 20:7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신 20:1네가 나가 대적과 싸우려할 때에 말과 병거와 민중이 너보다 많음을 볼찌라도 그들을 두려워 말라
민 13:31-33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20모세의 명한대로 헤브론을 갈렙에게 — 아낙의 세 아들을 쫓아내다
무리가 모세의 명한대로 헤브론을 갈렙에게 주었더니 그가 거기서 아낙의 세 아들을 쫓아내었고
직역 그들이 모세가 말한 대로 헤브론을 갈렙에게 주었다. 그는 거기서 아낙의 세 아들을 쫓아냈다.
19절의 ‘쫓아내지 못하였다’ 바로 다음에, 사사기 기자는 일부러 ‘쫓아낸’ 사람을 보여 줍니다. 갈렙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철병거를 보고 물러섰지만, 갈렙은 거인을 쫓아냈습니다. 같은 동사(야라쉬)가 쓰였습니다. 19절 ‘쫓아내지 못하였다’ 그리고 20절 ‘쫓아내었다’.
“모세의 명한대로.” 40년 전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약속하셨습니다.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민 14:24). 갈렙은 45년을 기다렸고,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갈렙은 그 약속을 그냥 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싸워 ‘차지’했습니다.
이 대비는 의도적입니다. 문제는 철병거가 아니었습니다. 같은 하나님을 섬긴 갈렙은 거인도 쫓아냈습니다. 차이는 ‘온전히 좇는’ 마음에 있었습니다.
원어 · 번역 노트
온전히 좇았다 — 민 14:24, 32:12, 신 1:36, 수 14:8, 9, 14. 갈렙에게만 거듭 붙는 칭찬입니다. 원문은 ‘내 뒤를 가득 채워 따랐다’는 뜻의 독특한 표현입니다(밀레 아하레).
세 아들 — 수 15:14 “갈렙이 거기서 아낙의 소생 곧 그 세 아들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쫓아내었고”.
함께 읽을 말씀
민 14:24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신 1:36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를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수 14:13-14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21베냐민 자손은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다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한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에 거하더라
직역 예루살렘에 사는 여부스 사람을 베냐민 자손이 몰아내지 않았다. 그래서 여부스 사람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까지 예루살렘에 살았다.
이제 유다 지파를 떠나 다른 지파들의 상황이 보고됩니다. 그 첫 번째가 베냐민입니다. 그리고 첫 보고부터 실패입니다.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에 거하더라.”
여호수아 15:63에는 거의 같은 문장이 유다에 대해 나옵니다. 예루살렘은 유다와 베냐민의 경계에 있었기 때문에 두 지파 모두의 책임이었습니다. 8절에서 유다가 성을 불살랐지만, 여부스 사람들은 다시 돌아와 살았고, 베냐민은 그들을 몰아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까지.” 이 표현은 이 기록이 쓰인 때가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기(삼하 5장) 이전이라는 단서가 됩니다. 적어도 이 자료는 아직 여부스 사람이 예루살렘에 살던 때에 쓰였습니다.
베냐민이 예루살렘에서 실패한 것은 작은 일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사기 19–21장에서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안에서 가장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거의 멸절 직전까지 갑니다. 가나안 사람을 몰아내지 않고 함께 산 지파가, 결국 가나안 사람보다 더 가나안 사람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원어 · 번역 노트
오늘날까지 — 사사기에서 여러 번 나오는 표현(1:21, 26; 6:24; 10:4; 15:19; 18:12; 19:30). 저자가 기록할 당시까지 그 상태가 이어졌다는 뜻입니다.
여부스 — 창 10:16에서 가나안의 자손으로 나옵니다. 다윗 시대에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오르난)의 타작마당을 다윗이 사서 제단을 쌓았고, 그곳에 솔로몬의 성전이 세워졌습니다(삼하 24:18–25, 대하 3:1).
함께 읽을 말씀
수 15:63예루살렘 거민 여부스 사람을 유다 자손이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이 오늘날까지 유다 자손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하니라
수 18:28셀라와 엘렙과 여부스 곧 예루살렘과… 이는 베냐민 자손이 그 가족대로 얻은 기업이었더라
삼하 5:6-9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성이더라
삿 20:12-13이스라엘 지파들이 베냐민 온 지파에 사람들을 보내어 두루 행하며 이르기를 너희 중에서 생긴 이 악이 어찜이뇨
TODAY'S MESSAGE · 오늘의 메시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데, 나는 왜 쫓아내지 못할까
19절과 20절은 나란히 서 있는 두 장면입니다. 한쪽에는 철병거를 보고 물러선 사람들, 다른 한쪽에는 거인을 쫓아낸 갈렙. 둘 다 같은 하나님이 함께하셨습니다. 차이는 그 하나님을 얼마나 믿었느냐, 얼마나 온전히 따랐느냐에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쫓아내지 못한’ 영역이 있습니다. 습관적인 죄, 끊지 못한 관계, 내려놓지 못한 두려움. 우리는 그것을 ‘철병거’ 탓으로 돌리곤 합니다. 환경 때문에, 성격 때문에, 상황 때문에. 그러나 하나님은 철병거 구백 승도 무너뜨리시는 분입니다. 오늘 내 안에 남겨 둔 여부스 사람은 누구입니까? 작게 남겨 둔 그것이 나중에 내 삶을 가장 크게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1:22–26요셉 족속이 벧엘을 취하다 — 그리고 살아남아 또 하나의 루스를 세운 사람
이제 북쪽 지파들의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첫 이야기는 요셉 족속(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벧엘 정복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22절). 출발은 유다처럼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이상하게 여호수아 2장의 라합 이야기와 닮았으면서도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정탐꾼, 성의 비밀 통로를 알려 준 사람, 살려 준 가족. 그러나 라합은 이스라엘 가운데 들어와 메시아의 조상이 되었고, 이 사람은 이스라엘을 떠나 다른 곳에 옛 가나안 성읍을 다시 세웁니다. 정복은 했지만, 가나안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22요셉 족속도 벧엘을 치러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다
요셉 족속도 벧엘을 치러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
직역 요셉의 집도 그들 역시 벧엘로 올라갔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다.
요셉 족속은 에브라임과 므낫세 두 지파를 함께 부르는 이름입니다. 이들은 가나안 중앙의 가장 좋은 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벧엘로 올라갑니다.
벧엘은 이스라엘에게 아주 특별한 곳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도망칠 때, 이곳에서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는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그곳 이름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 불렀습니다(창 28:17–19). 그 하나님의 집을 이제 이스라엘이 되찾으러 올라갑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 19절에서 유다에게 하신 말과 똑같습니다. 출발은 똑같이 좋았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분의 백성과 함께하시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어떻게 되는지는 백성에게 달려 있습니다.
원어 · 번역 노트
요셉 족속 — 원문 ‘베트 요세프’, 직역하면 ‘요셉의 집’. 22절 ‘요셉의 집’이 ‘하나님의 집(벧엘)’으로 올라가는 말놀이가 있습니다.
벧엘 — 예루살렘 북쪽 약 19km. 나중에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졌을 때, 북이스라엘 여로보암이 벧엘에 금송아지를 세워 우상 숭배의 중심지로 만듭니다(왕상 12:28–29). 그래서 호세아는 벧엘(하나님의 집)을 ‘벧아웬’(악의 집)이라고 비꼬았습니다(호 4:15).
함께 읽을 말씀
창 28:16-19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창 35:6-7야곱과 그와 함께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그가 거기서 단을 쌓고
왕상 12:28-29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23벧엘을 정탐케 하다 — 본 이름은 루스
요셉 족속이 벧엘을 정탐케 하였는데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루스라
직역 요셉의 집이 벧엘을 살피게 하였다. 그 성의 이름은 전에 루스였다.
요셉 족속은 먼저 성을 정탐합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했던 것과 같은 방법입니다(수 2:1). 그리고 성경은 다시 한번 그 성의 옛 이름을 알려 줍니다. “루스.”
‘루스’는 아몬드나무라는 뜻입니다. 야곱이 사닥다리를 본 그 성의 원래 이름입니다(창 28:19). 야곱은 이곳을 ‘하나님의 집’으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가나안 사람들은 여전히 ‘루스’라고 불렀습니다. 이스라엘의 기억 속에는 벧엘이었고, 가나안 사람의 손에는 루스였습니다. 이 두 이름 사이의 긴장이 26절에서 다시 나옵니다.
원어 · 번역 노트
정탐케투르 — ‘둘러보다, 탐색하다’. 민 13:2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탐지하게 하되”의 ‘탐지하다’가 같은 말입니다.
루스 — 창 28:19, 35:6, 48:3, 수 16:2, 18:13. 히브리어로 아몬드나무. 렘 1:11–12 “살구나무 가지를”는 다른 단어이지만 비슷한 나무입니다.
함께 읽을 말씀
창 28:19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수 2:1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으로 가만히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24성읍의 입구를 가르치라 — 그리하면 너를 선대하리라
탐정이 그 성읍에서 한 사람의 나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성읍의 입구를 우리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너를 선대하리라 하매
직역 망보던 자들이 그 성에서 나오는 한 사람을 보았다. 그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제발 그 성의 입구를 우리에게 보여 다오. 그러면 우리가 너에게 신의를 베풀겠다.”
정탐꾼들은 성에서 나오는 한 사람을 붙잡고 거래를 제안합니다. “이 성읍의 입구를 우리에게 가르치라.” 고대의 성은 정문 말고도 물을 길으러 가는 비밀 통로나 작은 뒷문이 있곤 했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할 때도 ‘물 긷는 데’(삼하 5:8)로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하면 너를 선대하리라.” 여기서 ‘선대’는 히브리어 ‘헤세드’입니다. 하나님이 언약 백성에게 베푸시는 변함없는 사랑, 신의, 인자를 뜻하는 아주 무거운 말입니다. 라합도 정탐꾼에게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수 2:12)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나 두 이야기는 다릅니다. 라합은 먼저 하나님을 고백했습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수 2:11). 그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었기에 정탐꾼을 숨겨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루스 사람에게서는 어떤 신앙고백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목숨을 위한 거래를 했을 뿐입니다.
원어 · 번역 노트
탐정쇼메림 — ‘지키는 자, 파수꾼’. 23절의 ‘정탐하다’와 다른 말로, 성 밖에서 망을 보며 기다린 사람들입니다.
선대헤세드 — 구약에서 240번 넘게 나오는 중요한 말. 『개역한글』은 ‘인자, 은총, 긍휼, 선대’ 등 여러 가지로 옮겼습니다. 언약에 근거한 신실한 사랑입니다.
함께 읽을 말씀
수 2:11-14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삼하 5:8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수구로 올라가서
25그 사람이 입구를 가르치매 — 그와 가족을 놓아 보내다
그 사람이 성읍의 입구를 가르친지라 이에 칼날로 그 성읍을 쳤으되 오직 그 사람과 그 가족을 놓아 보내매
직역 그가 그들에게 그 성의 입구를 보여 주었다. 그들이 그 성을 칼날로 쳤다. 그러나 그 사람과 그의 온 가족은 보내 주었다.
그 사람이 길을 가르쳐 주자 요셉 족속은 성을 칼날로 칩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그 사람과 그 가족을 살려 줍니다. 여기까지는 라합 이야기와 똑같습니다(수 6:22–25).
그런데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라합과 그 가족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으니”(수 6:25). 그녀는 이스라엘 백성 안으로 들어왔고, 살몬과 혼인하여 보아스를 낳았으며,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릅니다(마 1:5). 반면 이 루스 사람은 “놓아 보내”졌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이스라엘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갑니다.
원어 · 번역 노트
놓아 보내매샬라흐 강세형 — ‘보내다, 내보내다’. 출애굽 이야기에서 “내 백성을 보내라”의 ‘보내다’가 같은 말입니다. 여기서는 이스라엘이 그를 붙잡지 않고 떠나게 했다는 뜻입니다.
함께 읽을 말씀
수 6:25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 아비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으니
마 1:5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히 11:31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26그 사람이 헷 사람의 땅에 가서 또 하나의 루스를 세우다
그 사람이 헷 사람의 땅에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그 이름을 루스라 하였더니 오늘날까지 그곳의 이름이더라
직역 그 사람이 헷 사람의 땅으로 가서 성을 짓고 그 이름을 루스라 불렀다. 그것이 오늘까지 그 이름이다.
이 짧은 구절이 이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살아남은 그 사람은 헷 사람의 땅, 곧 북쪽으로 가서 새 성읍을 세우고, 그 이름을 다시 “루스”라고 짓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은 루스를 무너뜨리고 벧엘, 곧 ‘하나님의 집’을 되찾았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의 루스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른 곳으로 옮겨 가서 다시 세워졌습니다. 가나안의 문화와 생활 방식이 이스라엘 땅 밖에서 그대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쓰임 받았지만, 하나님께로 돌아오지는 않았습니다. 라합과 똑같은 기회를 얻었지만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택하지 않고 자기 옛 정체성을 다시 세웠습니다. 사사기 기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 1장 전체의 주제를 압축합니다. 가나안을 무너뜨린 것 같지만, 가나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27–36절에서는 아예 이스라엘 땅 한가운데서 가나안이 그대로 살아남습니다.
우리 신앙에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옛 삶을 무너뜨린 것 같은데, 그 옛 이름이 다른 모양으로 다시 세워집니다. 바울은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엡 4:22–24)고 말합니다. 옛 사람을 다른 장소로 옮겨 놓는 것이 아니라, 벗어 버려야 합니다.
원어 · 번역 노트
헷 사람의 땅 — 헷(히타이트) 제국은 오늘날 튀르키예 중부에 중심을 둔 큰 나라였고, 그 영향이 시리아 북부까지 미쳤습니다. 여호수아 1:4 “헷 족속의 온 땅”도 북쪽 유브라데까지의 땅을 가리킵니다.
새 루스의 위치 —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레바논이나 시리아 북부의 지명들과 연결하는 시도가 있지만 확실하지 않습니다.
함께 읽을 말씀
수 1:4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엡 4:22-24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
고후 5: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TODAY'S MESSAGE · 오늘의 메시지
무너뜨린 것과 벗어 버린 것은 다릅니다
요셉 족속은 루스를 쳐서 벧엘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루스라는 이름은 다른 땅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겉으로는 승리했지만, 가나안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우리는 어떤 죄를 ‘무너뜨렸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장소만 옮겨 두었을 때가 많습니다. 집에서는 버렸지만 마음 한구석에, 교회에서는 내려놓았지만 직장에서, 행동은 멈췄지만 생각 속에. 라합은 옛 삶을 떠나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로 들어왔고, 메시아의 족보에 이름이 올랐습니다. 루스 사람은 살아남았지만 옛 이름을 다시 세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옛 이름을 옮겨 심는 삶이 아니라, 새 이름으로 사는 삶을 주십니다.
1:27–36쫓아내지 못하였다, 쫓아내지 못하였다 — 점점 깊어지는 타협
1장의 마지막 단락은 실패의 목록입니다. 므낫세(27–28절), 에브라임(29절), 스불론(30절), 아셀(31–32절), 납달리(33절), 단(34–36절).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그리고 목록이 이어질수록 상황은 점점 나빠집니다.
이 단락을 꼼꼼히 읽으면 실패에도 단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① 처음에는 가나안 사람이 이스라엘 가운데 살았습니다(29절). ② 그러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사람에게 노역을 시키며 이익을 봅니다(28, 30, 33, 35절). ③ 그다음엔 이스라엘이 가나안 사람 가운데 삽니다(32, 33절). ④ 마지막으로 단 지파는 가나안 사람에게 쫓겨납니다(34절). 쫓아내야 할 사람이 쫓겨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27므낫세가 벧스안과 다아낙과 므깃도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매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 향리의 거민과 다아낙과 그 향리의 거민과 돌과 그 향리의 거민과 이블르암과 그 향리의 거민과 므깃도와 그 향리의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
직역 므낫세는 벧스안과 그 딸들, 다아낙과 그 딸들, 돌의 주민들과 그 딸들, 이블르암의 주민들과 그 딸들, 므깃도의 주민들과 그 딸들을 몰아내지 않았다. 가나안 사람은 이 땅에서 살기로 작정하였다.
므낫세 지파가 쫓아내지 못한 다섯 성읍의 이름이 나옵니다. 벧스안, 다아낙, 돌, 이블르암, 므깃도. 지도를 펴 보면 놀라운 사실이 드러납니다. 이 성읍들은 모두 이스르엘 골짜기와 해안을 따라 늘어선 전략 요충지입니다. 동쪽 요단 골짜기에서 서쪽 지중해 해안까지, 가나안 땅을 가로지르는 큰길을 지키는 성들입니다. 그러니 이 성들을 남겨 두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땅이 남쪽(유다)과 북쪽(갈릴리)으로 끊어지는 띠를 남겨 두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 이 말에는 가나안 사람의 고집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떠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들을 끝까지 밀어내지 않았습니다. 상대가 버티면 물러서는 것, 그것이 므낫세의 실패였습니다.
이 성읍들은 나중에 이스라엘 역사에서 계속 등장합니다. 다아낙과 므깃도 근처에서 드보라와 바락이 시스라를 쳤고(5:19), 벧스안 성벽에는 사울의 시체가 걸렸습니다(삼상 31:10). 남겨 둔 땅이 결국 이스라엘의 피를 흘리는 땅이 되었습니다.
원어 · 번역 노트
향리바노트 — 직역하면 ‘딸들’. 큰 성(어머니)에 딸린 작은 마을들을 딸이라고 부르는 히브리식 표현입니다. 『개역개정』은 ‘그에 딸린 마을들’로 옮겼습니다.
결심하고야알 히필형 — ‘마음먹다, 작정하다, 기꺼이 하다’. 출 2:21 “모세가 그와 동거하기를 기뻐하매”, 수 7:7에서도 쓰였습니다. 가나안 사람이 강한 의지로 버텼다는 뜻입니다.
므깃도 —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잇는 해안길(비아 마리스)의 관문. 수많은 전쟁이 이곳에서 벌어졌습니다. 계 16:16 ‘아마겟돈’은 ‘하르 므깃도’(므깃도의 산)에서 온 이름으로 봅니다.
여호수아서 — 수 17:11–13에 거의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함께 읽을 말씀
수 17:11-13므낫세… 벧스안과 그 향리와 이블르암과 그 향리와… 므깃도 거민과 그 향리… 그러나 므낫세 자손이 그 성읍들의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
삿 5:19열왕이 와서 싸울 때에 가나안 열왕이 므깃도 물 가 다아낙에서 싸웠으나
삼상 31:10그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 박으매
계 16:16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28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다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직역 이스라엘이 강해졌을 때, 그들은 가나안 사람을 강제 노역에 두었다. 그러나 그를 몰아내기는 결코 몰아내지 않았다.
이 구절은 1장에서 가장 날카로운 고발입니다. 27절까지는 ‘쫓아내지 못했다’는 말이 능력이 없어서였다고 변명할 여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28절은 그 변명을 무너뜨립니다.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이스라엘이 힘이 생겼습니다. 이제는 철병거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힘으로 무엇을 했습니까?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않고 “사역을 시켰습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쫓아내는 것보다 부려 먹는 것이 이익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사람은 이미 그 땅에서 농사짓는 법, 성을 짓는 법, 물을 대는 법을 알았습니다. 그들을 쫓아내면 이스라엘이 그 일을 다 해야 했지만, 그들을 남겨 두면 값싼 노동력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명령보다 경제적 이익이 더 커 보였습니다.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원문은 같은 동사를 두 번 겹쳐 강조합니다. ‘몰아내기는 결코 몰아내지 않았다.’ 여기서 ‘못하였다’가 아니라 ‘아니하였다’입니다. 능력이 아니라 의지의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은 왜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라고 하셨을까요? 사람을 미워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신명기 7:4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가나안 사람이 남으면 그들의 신도 남습니다. 그들과 함께 일하고, 거래하고, 혼인하다 보면 그들의 바알도 함께 들어옵니다. 실제로 2–3장은 정확히 그렇게 진행됩니다. 이익을 위해 남겨 둔 것이 결국 이스라엘의 영혼을 빼앗았습니다.
원어 · 번역 노트
사역마스 — ‘강제 노역, 부역’. 솔로몬은 가나안 족속의 남은 자들에게 노역을 시켜 성전과 궁궐을 지었습니다(왕상 9:20–21). 그리고 그 노역 제도가 결국 이스라엘 백성에게까지 확대되어 나라가 갈라지는 원인이 됩니다(왕상 12:4, 18).
강조 구문 — ‘호레쉬 로 호리쇼’. 히브리어는 같은 동사의 부정사를 앞에 붙여 뜻을 강하게 합니다. 수 17:13에도 같은 표현이 있습니다.
신명기의 명령 — 신 7:2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신 20:16–18.
함께 읽을 말씀
수 17:13이스라엘 자손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신 7:2-4그들과 혼인하지 말찌니…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삿 2:3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왕상 9:20-21이스라엘 자손이 다 멸하지 못하므로 그 땅에 남아 있는 그 자손들을 솔로몬이 노예로 역군을 삼아 오늘까지 이르렀으되
딤전 6:9-10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29에브라임이 게셀의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매 — 그들 중에 거하였다
에브라임이 게셀에 거한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하였더라
직역 에브라임은 게셀에 사는 가나안 사람을 몰아내지 않았다. 그래서 가나안 사람이 게셀에서 그 가운데 살았다.
에브라임은 므낫세와 함께 요셉 족속을 이루는 큰 지파입니다. 그런데 이 지파도 게셀의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게셀은 서쪽 해안 평야에서 예루살렘 쪽 산지로 올라가는 길목을 지키는 요새였습니다.
여기서 실패의 첫 단계가 나타납니다. “가나안 사람이… 그들 중에 거하였더라.” 가나안 사람이 이스라엘 ‘가운데’ 삽니다. 이스라엘이 주인이고, 가나안 사람이 그 안에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아직은 이스라엘이 우위에 있습니다. 그러나 누룩이 반죽 속에 들어가면 결국 온 덩이에 퍼지는 법입니다(고전 5:6).
게셀은 수백 년 뒤 솔로몬 시대에야 이스라엘 손에 들어옵니다. 그것도 이스라엘의 힘으로가 아니라, 이집트 왕 바로가 게셀을 정복해서 자기 딸을 솔로몬에게 시집보낼 때 지참금으로 준 것입니다(왕상 9:16). 하나님의 명령으로 얻어야 할 땅을 이방 왕의 혼인 선물로 얻은 셈입니다.
원어 · 번역 노트
그들 중에베키르보 — ‘그의 가운데에, 그의 속에’. 단수형으로 에브라임 지파를 가리킵니다. 32절에서는 반대로 아셀이 가나안 사람 ‘가운데’ 삽니다.
게셀 — 수 16:10에 같은 내용이 있고, 거기에는 “가나안 사람이 오늘날까지 에브라임 가운데 거하며 사역하는 종이 되니라”가 덧붙어 있습니다. 게셀에서는 기원전 10세기 농사력(게셀 달력)이 발견되었습니다.
함께 읽을 말씀
수 16:10그들이 게셀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가나안 사람이 오늘날까지 에브라임 가운데 거하며 사역하는 종이 되니라
왕상 9:16애굽왕 바로가 올라와서 게셀을 탈취하여 불사르고 그 성에 사는 가나안 사람을 죽이고 그 성읍을 자기 딸 솔로몬의 아내에게 예물로 주었더니
고전 5:6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30스불론은 기드론과 나할롤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였다
스불론은 기드론 거민과 나할롤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나 가나안 사람이 그들 중에 거하여 사역을 하였더라
직역 스불론은 기드론 주민과 나할롤 주민을 몰아내지 않았다. 그래서 가나안 사람이 그 가운데 살며 노역하는 자가 되었다.
스불론도 같은 길을 걷습니다. 기드론과 나할롤의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않고, 그들 가운데 살게 두며 노역을 시켰습니다. 므낫세(28절)와 에브라임(29절)의 실패가 스불론에서 하나로 합쳐집니다. 가나안 사람이 그들 ‘중에’ 살면서, ‘사역’을 합니다.
이렇게 똑같은 문장이 지파마다 되풀이되는 것은 지루한 목록이 아닙니다. 사사기 기자는 일부러 같은 말을 쌓아 올려 독자가 느끼게 합니다. 한 지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같은 타협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것이 ‘시대의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하니, 아무도 그것이 잘못이라고 느끼지 못했습니다.
원어 · 번역 노트
기드론 — 수 19:15의 ‘갓닷’과 같은 곳으로 봅니다. 철자가 비슷합니다.
나할롤 — 수 19:15, 21:35의 ‘나할랄’. 오늘날 이스라엘의 ‘나할랄’ 마을 근처로 추정합니다.
아셀의 목록은 가장 깁니다. 일곱 성읍의 이름이 줄줄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 시돈이 있습니다. 시돈은 페니키아의 큰 항구 도시로, 바알과 아스다롯 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훗날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이 바로 시돈 왕의 딸이었고, 그녀가 이스라엘에 바알 숭배를 퍼뜨렸습니다(왕상 16:31).
사사기 10:6에서 이스라엘은 “시돈의 신들”을 섬깁니다. 1장에서 쫓아내지 않은 그 시돈이, 10장에서 이스라엘이 섬기는 신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원어 · 번역 노트
악고 — 오늘날 이스라엘 북부의 아코. 신약 시대에는 ‘돌레마이’(프톨레마이스)로 불렸습니다.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갈 때 이곳에 들렀습니다(행 21:7).
왕상 16:31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로 아내를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
32아셀이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다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으니 이는 쫓아내지 못함이었더라
직역 그래서 아셀 사람은 그 땅 주민인 가나안 사람 가운데 살았다. 그들을 몰아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29절과 30절에서는 가나안 사람이 이스라엘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런데 32절에서는 아셀이 가나안 사람 가운데 삽니다. 주어와 장소가 뒤집혔습니다.
이것은 숫자와 힘의 균형이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이제 그 땅의 주인은 가나안 사람이고, 아셀은 그 안에 섞여 사는 소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사역을 시켰다’는 말도 없습니다. 아셀은 가나안 사람을 부리지도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나안을 바꾸어야 했는데, 오히려 가나안 속으로 녹아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드보라의 노래(5:17)에서 아셀은 시스라와의 싸움에 오지 않고 “해변에 앉으며 자기 항구에 거하였도다”라고 책망받습니다. 가나안 사람 가운데 섞여 살던 지파는, 하나님의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일어서지 않았습니다.
원어 · 번역 노트
가운데케레브 — ‘속, 한가운데’. 29절의 ‘베키르보’(그의 가운데)와 같은 낱말이지만 주어가 바뀌었습니다. 29–30절: 가나안 사람이 이스라엘 가운데 → 32–33절: 이스라엘이 가나안 사람 가운데.
함께 읽을 말씀
삿 5:17아셀은 해빈에 앉고 자기 시냇가에 거하도다
시 106:34-36저희가 여호와의 명을 좇지 아니하여 이족들을 멸하지 아니하고 열방과 섞여서 그 행위를 배우며 그 우상들을 섬기므로 그것이 저희에게 올무가 되었도다
고후 6:14, 17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33납달리가 벧세메스와 벧아낫 거민 가운데 거하였다
납달리가 벧세메스 거민과 벧아낫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으나 벧세메스와 벧아낫 거민들이 그들에게 사역을 하였더라
직역 납달리는 벧세메스 주민과 벧아낫 주민을 몰아내지 않았다. 그래서 그 땅의 주민인 가나안 사람 가운데 살았다. 그러나 벧세메스와 벧아낫 주민은 그들에게 노역하는 자가 되었다.
납달리가 쫓아내지 못한 두 성읍의 이름을 보십시오. 벧세메스는 ‘태양의 집’, 벧아낫은 ‘아낫의 집’입니다. 둘 다 가나안 신의 이름을 딴 신전 도시입니다. 아낫은 바알의 누이이자 아내로 여겨진 잔인한 전쟁 여신이었습니다.
그러니 납달리가 이 성들을 남겨 두었다는 것은, 가나안의 신전들을 자기 땅 한가운데 그대로 남겨 두었다는 뜻입니다. 노역은 시켰지만, 신전은 무너뜨리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부리는 것으로 만족했지, 우상을 없애는 데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납달리는 “가나안 사람 가운데” 삽니다. 아셀과 같은 처지입니다. 다만 아셀과 달리 노역은 시켰습니다. 이스라엘이 소수인데도 다수의 가나안 사람을 부릴 수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결코 무력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았습니다.
원어 · 번역 노트
벧세메스 — 유다 땅에도 같은 이름의 성읍이 있습니다(삼상 6:9–19, 법궤가 돌아온 곳). 여기서는 납달리 땅의 다른 벧세메스입니다(수 19:38).
아낫 — 우가릿 문서(기원전 14–13세기)에 나오는 가나안의 여신. 바알의 원수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전쟁의 여신으로 묘사됩니다. 사사 삼갈은 ‘아낫의 아들’이라 불립니다(삿 3:31).
함께 읽을 말씀
수 19:32, 38여섯째로 납달리 자손을 위하여… 이론과 믹다렐과 호렘과 벧아낫과 벧세메스니
신 12:2-3너희가 쫓아낼 민족들이 그 신들을 섬기는 곳은… 그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삿 3:31에훗의 후에 아낫의 아들 삼갈이
34아모리 사람이 단 자손을 산지로 쫓아들이다
아모리 사람이 단 자손을 산지로 쫓아들이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지 아니하고
직역 아모리 사람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붙였다. 골짜기로 내려오는 것을 그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목록의 마지막은 단 지파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실패는 바닥을 칩니다. 다른 지파들은 적어도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못했을’ 뿐이었는데, 단 지파는 오히려 아모리 사람에게 쫓겨납니다. 쫓아내야 할 자가 쫓겨나는 자가 되었습니다.
단은 원래 지중해 쪽 평야, 오늘날 텔아비브 근처의 좋은 땅을 받았습니다(수 19:40–46). 그런데 아모리 사람이 그들을 “산지로 쫓아들이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지 아니하였습니다.” 받은 땅에 발을 들여놓지도 못한 것입니다.
이 실패의 결과가 사사기 18장에 나옵니다. 단 지파는 자기 기업을 차지하지 못하자, 북쪽 끝 라이스라는 평화로운 성읍을 쳐서 빼앗고 거기 정착합니다. 그리고 미가의 집에서 훔친 신상을 세워 우상 숭배의 중심지를 만듭니다(18:30–31). 하나님이 주신 땅을 믿음으로 차지하지 못한 지파가, 하나님이 주지 않은 땅을 폭력으로 빼앗고 거기에 우상을 세운 것입니다. 사사기 1장의 이 한 구절은 18장의 비극을 미리 내다봅니다.
원어 · 번역 노트
쫓아들이고라하츠 — ‘누르다, 압박하다, 억압하다’. 출 3:9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의 ‘괴롭게 하다’, 삿 2:18 “압제하는”, 4:3 “심히 학대하였으므로”도 같은 말입니다.
아모리 사람 — ‘서쪽 사람’이라는 뜻의 아카드어 ‘아무루’에서 온 이름. 성경은 이 이름을 가나안 원주민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도 씁니다(창 15:16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단의 이주 — 수 19:47 “단 자손의 지경이 더욱 확장되었으니 이는 단 자손이 올라가서 레센을 쳐서”. 삿 18장에서 자세히 나옵니다.
함께 읽을 말씀
수 19:47단 자손의 지경이 더욱 확장되었으니 이는 단 자손이 올라가서 레센을 쳐서 취하여… 거기 거하였음이라
삿 18:1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이 때에 거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삿 18:30단 자손이 자기를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창 49:16-17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단은 길의 뱀이요
35아모리 사람이 헤레스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거하다가 — 필경은 사역을 하였다
결심하고 헤레스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거하였더니 요셉 족속이 강성하매 아모리 사람이 필경은 사역을 하였으며
직역 아모리 사람은 헤레스 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서 살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나 요셉의 집의 손이 무거워지자 그들은 노역하는 자가 되었다.
단 지파를 산으로 몰아낸 아모리 사람은 헤레스산, 아얄론, 사알빔에 자리를 잡습니다. 단 지파가 받은 땅의 성읍들입니다(수 19:41–42). 아얄론은 여호수아가 기도해서 해와 달이 멈추었던 바로 그 골짜기입니다(수 10:12). 하나님이 가장 놀라운 기적으로 승리를 주셨던 땅을, 이제는 가나안 사람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요셉 족속이 강성하매” 아모리 사람이 마침내 노역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해낸 것은 단 지파가 아니라 이웃 요셉 족속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쫓아낸 것이 아니라 역시 ‘사역’을 시켰을 뿐입니다. 28절의 패턴이 다시 반복됩니다. 힘이 생겼을 때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자기 이익을 택했습니다.
헤레스산의 ‘헤레스’는 ‘태양’이라는 뜻입니다. 33절의 ‘벧세메스’(태양의 집)와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2:9에서 여호수아가 묻힌 곳이 ‘딤낫 헤레스’, 곧 ‘태양의 몫’으로 불립니다. 여호수아서에서는 ‘딤낫 세라’(남은 몫)였던 이름입니다. 사사기는 이 작은 이름 하나로, 이스라엘 땅 곳곳에 가나안의 태양 숭배 이름이 스며들고 있었음을 조용히 드러냅니다.
헤레스헤레스 — ‘태양’. 시적인 말로 욥 9:7에도 나옵니다. 8:13 기드온이 돌아온 ‘헤레스 비탈’도 같은 말입니다.
아얄론 — 수 10:12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찌어다”
함께 읽을 말씀
수 10:12-13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찌어다 하매
수 19:41-42그 기업의 지경은 소라와 에스다올과 이르세메스와 사알랍빈과 아얄론과
삿 2:9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산 북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
36아모리 사람의 지계는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부터
아모리 사람의 지계는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부터 그 위였더라
직역 아모리 사람의 경계는 전갈 고개에서부터, 바위에서부터 그 위로였다.
1장은 뜻밖의 문장으로 끝납니다. 이스라엘의 땅을 정리하며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모리 사람의 경계를 정리하며 끝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땅을 주셨는데, 1장의 마지막 구절은 그 땅 안에 아모리 사람의 영토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지도처럼 그려 보입니다.
아그랍빔 비탈은 ‘전갈 고개’라는 뜻으로, 사해 남쪽에서 네게브 고원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고갯길입니다. 원래 이곳은 이스라엘 땅의 남쪽 경계였습니다(민 34:4, 수 15:3). 그러니 이 구절은, 이스라엘 땅의 남쪽 끝에서부터 아모리 사람의 땅이 시작된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이스라엘의 경계가 곧 아모리 사람의 경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 지파들의 경계를 정성껏 기록한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사기 1장은 가나안 사람의 경계를 기록하며 끝납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의 지도가 이렇게 다시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2장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보김에 나타나 이 지도를 두고 판결을 내리십니다.
원어 · 번역 노트
아그랍빔아크라빔 — ‘전갈들’. 지금도 ‘마알레 아크라빔’(전갈 고개)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구불구불한 길이 있습니다.
아모리 사람인가 에돔 사람인가 — 몇몇 헬라어 사본과 학자들은 이 구절의 ‘아모리 사람’을 ‘에돔 사람’(히브리어로 철자가 비슷함)으로 읽습니다. 지리적으로 아그랍빔과 셀라는 에돔 쪽 경계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바위셀라 — 에돔의 수도 ‘셀라’(왕하 14:7), 나중의 페트라와 연결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함께 읽을 말씀
민 34:3-4너희 남방은 에돔 곁에 접근한 신 광야니… 아그랍빔 언덕 남편에 이르고
수 15:3아그랍빔 비탈 남편으로 지나 신에 이르고
삿 2:1-2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가로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
TODAY'S MESSAGE · 오늘의 메시지
타협은 한 번에 오지 않고, 한 걸음씩 옵니다
27–36절을 천천히 읽으면, 이스라엘이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가나안 사람을 그냥 남겨 두었습니다. 그다음엔 그들을 부리며 이익을 보았습니다. 그다음엔 그들 가운데 섞여 살았습니다. 마지막에는 그들에게 쫓겨났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작아 보였지만, 그 걸음들이 모여 사사기 전체의 어둠이 되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무너짐도 대개 이렇게 옵니다. 큰 배신이 아니라, “이 정도는 괜찮겠지”, “이건 나에게 이익이 되니까”, “다들 그렇게 사는데”라는 작은 타협이 쌓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돌아보면, 내가 세상을 바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나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 안에 남겨 둔 가나안은 무엇이냐. 그것을 다스린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그것이 너를 다스리고 있느냐.
Map of Compromise · 정리
1장, 지파별 “쫓아내지 못한” 기록
목록이 이어질수록 이스라엘의 처지가 점점 나빠집니다
지파
쫓아내지 못한 곳
그 결과
유다 (19)
골짜기의 거민
‘철병거’를 이유로 듦
베냐민 (21)
예루살렘의 여부스 사람
여부스 사람이 함께 삶
므낫세 (27–28)
벧스안, 다아낙, 돌, 이블르암, 므깃도
강성해진 뒤에도 사역만 시킴
에브라임 (29)
게셀
가나안 사람이 이스라엘 가운데 삶
스불론 (30)
기드론, 나할롤
가나안 사람이 가운데 살며 사역
아셀 (31–32)
악고, 시돈 등 일곱 성읍
이스라엘이 가나안 사람 가운데 삶
납달리 (33)
벧세메스, 벧아낫
가나안 가운데 살되 사역은 시킴
단 (34–36)
받은 땅 전체
오히려 산지로 쫓겨남
목록을 따라가면 네 단계가 보입니다. ① 남겨 둠 → ② 이익을 위해 부림 → ③ 그들 가운데 섞여 삶 → ④ 그들에게 쫓겨남. 2장 3절에서 하나님은 이 결과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Glossary · 단어 사전
1장 어려운 단어 사전
옛 한자어와 원어를 오늘의 말로 풀었습니다
묻자와1절
‘묻다’의 옛 높임 표현. 하나님의 뜻을 여쭈었다는 뜻.
붙였노라2, 4절
넘겨주었다. 이미 이루어진 일처럼 말하는 약속.
제비3절
하나님의 뜻에 맡겨 땅을 나눈 방법. 그렇게 받은 몫.
브리스 사람4절
성벽 없는 마을에 살던 것으로 보이는 가나안 원주민.
수족手足 · 6–7절
손과 발.
엄지가락6–7절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
칼날로 치다8, 25절
‘칼의 입으로’ 치다. 철저히 공격하다.
남방南方 · 9, 15절
유다 남쪽의 마른 땅 네게브.
평지平地 · 9절
산지와 해안 사이의 낮은 구릉지대 셰펠라.
출가出嫁 · 14절
딸이 시집감.
종려나무 성읍16절
여리고의 다른 이름.
진멸殄滅 · 17절
하나님께 완전히 바쳐 남김없이 없앰. 히브리어 헤렘.
경내境內 · 18절
어떤 땅의 경계 안쪽, 그 영토.
철병거鐵兵車 · 19절
철로 보강한 전차. 평지에서 강력한 무기.
탐정探偵 · 24절
몰래 살피는 사람. 원문은 ‘지키는 자, 망보는 자’.
선대善待 · 24절
잘 대함. 원문 헤세드, 언약에 근거한 신의.
향리鄕里 · 27절
큰 성에 딸린 작은 마을들. 원문 ‘딸들’.
결심하고27, 35절
작정하고, 버티고. 가나안 사람의 고집.
강성強盛 · 28, 35절
힘이 강해짐.
사역使役 · 28–35절
나라가 부리는 강제 노역.
용납容納 · 34절
받아들여 허락함.
필경畢竟 · 35절
마침내, 결국.
지계地界 · 36절
땅의 경계.
For Reflection · 묵상과 나눔
묵상과 나눔을 위한 질문
이스라엘은 여호수아가 죽은 뒤 먼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1절). 나는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무엇을 할까’보다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실까’를 먼저 묻습니까? 최근에 그렇게 했던 경험을 나누어 봅시다.
아도니 베섹은 “하나님이 나의 행한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7절). 내가 심은 대로 거둔 경험이 있습니까? 그리고 십자가는 이 원리 앞에서 우리에게 어떤 소식이 됩니까?
갈렙의 가정에서 첫 사사 옷니엘이 나왔습니다(13절). 우리 가정은 다음 세대에게 어떤 믿음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까?
악사는 아버지에게 “내게 복을 주소서, 샘물도 주소서” 하고 구했습니다(15절). 지금 내가 하늘 아버지께 담대히 구해야 할 ‘샘물’은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함께 하셨으나… 철병거 때문에 쫓아내지 못하였다”(19절). 내 삶에서 ‘철병거’ 핑계를 대며 쫓아내지 못한 영역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은 강해진 뒤에도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않고 일을 시켰습니다(28절). 나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끊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남겨 둠 → 부림 → 섞여 삶 → 쫓겨남’이라는 네 단계 가운데, 지금 내 신앙은 어디쯤 와 있습니까? 오늘 내가 다시 시작해야 할 첫걸음은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