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마지막(3:31)에서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고 말했습니다. 4장은 바로 이 주장을 증명하는 장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곧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이신칭의가 바울이 만들어낸 새로운 교리가 아니라 율법(모세오경)이 처음부터 증언해 온 진리임을 보여줍니다.
핵심 본문은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입니다. 바울은 이 한 구절을 가지고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것(9-12절), 그래서 그가 할례자와 무할례자 모두의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다는 것(11-12절), 그리고 그의 믿음이 구체적으로 어떤 성격의 믿음이었는지(18-21절)를 촘촘히 풀어갑니다.
4장은 로마서 안에서 비교적 논증이 명료한 장이지만, "의로 여기다"(로기조마이)라는 회계 용어의 의미, 율법과 은혜·약속의 관계 같은 부분은 세심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각 구절 해설과 팝업에서 짚어드립니다.
창세기의 아브라함과 시편의 다윗, 율법서와 성문서 양쪽에서 증인을 세워 이신칭의가 구약 전체의 일관된 증언임을 보여줍니다.
유대인에게 아브라함은 모든 논쟁을 끝낼 수 있는 최고의 권위였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 아브라함을 데려와 묻습니다 — "그가 무엇을 근거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는가?" 만약 행위였다면 자랑할 근거가 있었겠지만, 이어지는 3절이 그렇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창세기 15:6의 직접 인용입니다. '여겨진'(로기조마이)은 원래 회계 장부에 무언가를 기입한다는 뜻의 상업 용어입니다. 아브라함 자신에게 실제로 완전한 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근거로 의를 그의 '계좌'에 기입해 주셨다는 법정적 선언입니다. 이 단어는 4장에서만 11번 반복되며 이 장 전체의 핵심 개념을 이룹니다.
일터의 비유로 명확히 대조합니다. 일한 것에 대한 삯은 '은혜'가 아니라 '당연한 보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경건하지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이라는 충격적인 표현을 쓰십니다. 이는 은혜가 자격 있는 자에게 주는 상이 아니라, 자격 없는 자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임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율법서(창세기)의 아브라함에 이어, 이번엔 성문서(시편)의 다윗을 증인으로 세웁니다. 시편 32편은 다윗이 큰 죄(밧세바 사건) 이후 쓴 회개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의로 여기다'(로기조마이)라는 같은 단어가 여기서는 반대 방향으로 쓰입니다 — 하나님께서 의를 '기입해 주심'과 죄를 '기입하지 않으심'은 결국 같은 은혜의 양면입니다.
창세기 연대기를 정확히 짚어,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창 15:6)이 할례를 받은 것(창 17장)보다 먼저였음을 논증합니다. 이 시간 순서 하나로 아브라함은 할례자와 무할례자 모두의 믿음의 조상이 됩니다.
바울은 창세기의 정확한 순서를 짚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어 의로 여겨진 것은 창세기 15장이고, 할례를 받은 것은 그로부터 최소 14년 뒤인 창세기 17장입니다. 즉 그는 할례를 받기 훨씬 전, 아직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무할례 상태에서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할례는 의를 만들어낸 원인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믿음의 의를 확인하고 인친 '표'(sign)와 '인'(seal)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중의 조상이 됩니다 — 할례 없이 믿은 모든 이방인 신자들의 조상이자, 동시에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할례자(유대인 신자)들의 조상입니다. 이는 로마 교회 안 유대인·이방인 신자들이 모두 동등하게 아브라함의 참된 후손임을 논증하는 결정적 근거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창 12, 15, 17장)이 애초에 율법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 은혜의 약속이었으며, 그렇기에 그 약속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굳게 서 있다는 것을 논증합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기 430년 전에(갈 3:17 참조) 이미 주어졌습니다. 시간 순서상으로도 언약은 율법에 근거할 수 없고, 오직 믿음에 근거합니다.
만약 율법을 지키는 것이 상속의 조건이라면, 애초에 은혜로 주어진 약속과 믿음은 무의미해집니다. 율법은 (지킬 때 상을 주는 체계가 아니라) 어길 때 그 위반을 명확히 드러내어 진노를 불러오는 기능을 합니다 — 이는 3:20의 논리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약속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명시됩니다 — 은혜와 행위는 함께 설 수 없고(11:6 참조), 오직 믿음만이 은혜와 짝을 이룹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의 성품 —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창조와 부활의 하나님 — 은 이어지는 18-21절에서 아브라함의 구체적 믿음의 내용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를 생생하게 묘사한 뒤, 이 이야기가 아브라함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를 위해 기록되었다고 결론짓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전혀 소망이 없는 상황(고령의 부부에게 자녀가 없음)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하나를 붙들고 소망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현실을 부정하는 맹목적 낙관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다는 냉정한 현실을 '알고도'(정확히 인식하고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참된 믿음은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보다 크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것입니다.
4장 전체의 결론이자 3:21-26으로의 회귀입니다. 아브라함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었듯, 우리는 실제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25절은 십자가와 부활을 정확히 짝지어 표현합니다 —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음에 내줌이 되셨고(속죄),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칭의의 확증) 다시 사셨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십자가의 효력도 확증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