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숨은 재밌는 이야기 · 29

요한일서,
손으로 만져 본
말씀

듣고, 보고, 만져 본 예수님을
편지로 남긴 노사도의 이야기

요한일서 1–5장
여는 글

요한일서는 편지인데 편지 같지 않은 편지예요. 보통 편지라면 “바울은 ○○교회에게” 하고 누가 누구에게 쓰는지부터 밝히잖아요. 그런데 요한일서는 보내는 사람 이름도, 받는 사람 이름도, 첫 인사도 없어요. 첫 줄부터 바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1:1)으로 들어가요. 😄 문을 열자마자 본론부터 꺼내는 할아버지 같아요.

그런데 읽다 보면 그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참 따뜻해요. “나의 자녀들아”, “사랑하는 자들아” 하고 계속 불러요. 단어는 쉬운데 뜻은 깊어서, 헬라어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읽는 책 가운데 하나이기도 해요. 손으로 만져 본 예수님, 하늘의 변호사, 목욕탕을 뛰쳐나온 사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한 줄까지, 쉬운 말 속에 숨은 이야기로 들어가 볼게요.

1부

요한일서는 어떤 책일까?

예수님을 직접 만난 사람이 남긴 사랑과 확신의 편지

요한일서에는 저자 이름이 없지만, 초대교회는 처음부터 이 편지를 사도 요한의 편지로 받아들였어요. 요한복음과 말투도, 단어도 쌍둥이처럼 닮았거든요. 요한은 예루살렘이 무너진 뒤 에베소에서 오래 살았다고 전해져요. 기록 시기는 1세기 끝 무렵, 90년 전후로 많이 봐요. 그때 교회에는 아픈 일이 있었어요. 함께 예배하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예수님은 육체로 오신 분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퍼뜨리다가 교회를 떠나 버렸거든요(2:19; 4:2-3). 남은 성도들은 흔들렸어요. 우리가 믿는 게 맞나, 우리에게 정말 영생이 있나. 요한은 그 성도들을 붙들어 주려고 이 편지를 썼어요.

편지 같지 않은 편지보내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인사도, 끝인사도 없어요. 그래서 한 교회에 보낸 편지라기보다, 여러 교회가 돌려 읽도록 쓴 설교문이나 목회 서신으로 보기도 해요.
쓰는 이유를 밝힌 편지요한은 왜 쓰는지 직접 말해요.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1:4), “죄를 범하지 않게”(2:1), 그리고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5:13) 하려고요.

※ 저자를 사도 요한으로 보는 것은 2세기 이레니우스 이래의 전통적인 견해예요. 2세기 초 폴리갑의 편지(빌립보인들에게 7:1)에도 요한일서 4:2-3과 거의 같은 말이 나와요.

요한일서의 큰 특징 다섯 가지
1
쉬운 단어, 깊은 뜻
빛, 생명, 사랑, 진리처럼 누구나 아는 단어로 가장 깊은 이야기를 해요.
2
“우리가 안다”
“이로써 우리가 아노라”는 말이 계속 되풀이돼요. 흔들리는 성도에게 확신을 주는 편지예요.
3
분명한 대조
빛과 어둠, 진리와 거짓, 사랑과 미움, 생명과 사망이 선명하게 갈려요.
4
사랑의 편지
“사랑”이라는 말이 신약의 어느 책보다 촘촘하게 나와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도 여기 있어요.
5
요한복음의 쌍둥이
“태초”, “생명”, “빛”, “새 계명”… 요한복음을 읽은 사람에게는 익숙한 말들이에요.

요한일서의 중심에는 이 고백이 있어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4:10). 요한은 “서로 사랑하라”고 수없이 말하지만, 그 사랑의 출발점은 우리가 아니에요.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먼저 아들을 보내 사랑하셨기 때문이에요(4:19).

2부

더 깊이 숨은 7가지 장면

만져 본 생명부터 마지막 한 줄의 경고까지

1

태초부터 계신 말씀을
손으로 만져 보았다

요한일서 1:1-4 · 요한복음 1:1, 14 · 누가복음 24:39 · 사도행전 17:27
들은 바귀로 들었어요
눈으로 본 바눈으로 보았어요
자세히 본 바오래 바라보았어요
손으로 만진 바손으로 직접 만졌어요

요한일서의 첫 문장은 점점 가까이 다가가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1:1). 멀리서 듣던 소리가, 눈앞의 모습이 되고, 오래 바라보다가, 마침내 손끝에 닿아요. 요한복음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 1:1)로 시작했다면, 요한일서는 그 말씀을 만져 본 사람의 증언으로 시작해요.

“만지다”는 프셀라파오예요. 이 단어가 재밌어요.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9) 하실 때 같은 단어가 쓰였어요. 그리고 바울이 아덴 사람들에게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행 17:27)이라고 할 때도 같은 단어예요. 😄 아덴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하나님을 더듬고 있었는데, 요한은 그분을 실제로 손으로 만져 봤다는 거예요.

요한이 이렇게 몸의 감각을 강조한 데는 이유가 있어요. 그때 “하나님의 아들이 진짜 몸을 입었을 리 없다,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요한은 말해요. 아니다, 내 손이 그분을 만졌다. 기독교는 좋은 생각이나 신비한 체험에서 출발하지 않아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요 1:14) 역사적인 사실에서 출발해요.

※ 예수님이 몸을 가진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는 주장을 교회사에서는 가현설(헬라어 도케오, “~처럼 보이다”)이라고 불러요. 요한일서가 맞선 거짓 가르침이 정확히 어떤 형태였는지는 학자들 사이에 논의가 있어요.

돌아보기
내 믿음이 막연한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 이 땅에 오셔서 죽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서 있음을 기억합니다.
2

땅에는 또 다른 보혜사,
하늘에는 우리의 변호사

요한일서 1:8-2:2 · 4:10 · 요한복음 14:16
요한복음 14:16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 성령님
VS
요한일서 2:1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 예수님

요한은 성도가 죄를 짓지 않기를 바라요. 그런데 현실도 알아요.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1:8). 그래서 이렇게 덧붙여요.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2:1).

“대언자”는 파라클레토스예요. 곁에 불려 와서 편들어 주는 사람, 법정의 변호인 같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 단어는 신약 전체에서 요한만 써요.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성령님을 가리켜 “또 다른 보혜사”(요 14:16)라고 하실 때 쓰였어요. “또 다른”이라는 말은, 첫 번째 보혜사가 따로 있다는 뜻이잖아요. 요한일서가 그 답을 알려 줘요. 첫 번째 파라클레토스는 예수님이세요. 😄 성도에게는 변호인이 두 분이나 계신 거예요. 땅에서는 성령님이 곁에 계시고, 하늘 아버지 앞에서는 예수님이 우리 편에 서 계세요.

게다가 이 변호인은 보통 변호인이 아니에요. 사람의 변호인은 “제 의뢰인은 죄가 없습니다” 하고 변론하지만, 예수님은 우리 죄를 부인하지 않으세요. 대신 이렇게 말씀하세요. 그 값은 제가 치렀습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2:2). 변호인이 곧 대신 형벌을 받으신 제물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용서하세요(1:9). 불쌍해서 봐주시는 게 아니라, 값이 이미 치러졌으니 의롭게 용서하시는 거예요.

※ “화목 제물”(힐라스모스)이라는 단어는 신약에서 요한일서 2:2과 4:10에만 나와요.

돌아보기
넘어진 날에도 숨지 않고 자백하며, 아버지 앞에서 나를 위해 서 계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합니다.
3

새 계명일까, 옛 계명일까,
그리고 노사도의 한마디

요한일서 2:7-11 · 3:11 · 요한복음 13:34 · 초대교회 전승

2장에서 요한은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해요.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2:7). 그러더니 바로 다음 절에서 “다시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2:8). 😄 새 계명이 아니라더니 새 계명이래요. 어느 쪽일까요?

둘 다 맞아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성도들이 믿음을 처음 가질 때부터 들은 말이라서 “옛” 계명이에요. 예수님이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하셨거든요. 그런데 이 계명은 여전히 “새” 계명이에요. 요한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해요.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2:8). 예수님이 오셔서 새 시대가 시작되었고, 그 사랑은 매일 새롭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거예요.

이 계명과 관련해 따뜻한 이야기가 하나 전해져요. 4세기 교부 제롬이 갈라디아서 주석에 남긴 이야기예요. 요한이 에베소에서 아주 늙어서, 제자들이 겨우 부축해 교회에 데려가야 할 정도가 되었대요. 그는 긴 설교를 할 수 없었고, 모일 때마다 딱 한마디만 했대요. “자녀들아, 서로 사랑하라.” 매번 같은 말만 하니 제자들이 지쳐서 물었대요. “선생님, 왜 늘 그 말씀만 하십니까?” 요한은 대답했어요. “그것이 주님의 계명이기 때문이다. 이것 하나만 지켜도 충분하다.”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앉았던 제자가(요 13:23) 평생 붙든 말이 결국 이것이었어요. 그리고 그 사랑은 요한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어요. 그 사랑은 예수님이 먼저 제자들을 사랑하신 그 사랑이었어요.

※ 노년의 요한 이야기는 제롬의 『갈라디아서 주석』(6:10 부분)에 기록된 전승이에요. 역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아니지만, 교회가 오래 사랑해 온 이야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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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 받은 사랑을 기억하며, 옛 계명이지만 오늘 새롭게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살아 냅니다.
4

“적그리스도”는
요한계시록에 없다?

요한일서 2:18-23 · 4:1-3 · 요한이서 7절

“적그리스도”라는 말을 들으면 많은 분들이 요한계시록을 떠올려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 단어는 요한계시록에 한 번도 나오지 않아요. 성경 전체에서 이 말이 나오는 곳은 딱 네 구절이에요. 요한일서 2:18, 2:22, 4:3, 그리고 요한이서 7절. 😄 계시록에서 찾으려고 하면 끝까지 넘겨도 안 나와요.

그러면 요한은 적그리스도를 누구라고 했을까요?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2:18). 요한은 먼 미래만 말하지 않고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있다고 해요. 그리고 누구인지 분명히 알려 줘요.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2:22). 그리고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4:3)이라고 해요. 바로 앞 절이 말하는 고백,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4:2)을 부인하는 거예요.

더 놀라운 건 이 사람들이 원래 교회 안에 있었다는 거예요.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2:19). 적그리스도는 무서운 괴물이 아니라, 함께 예배하다가 예수님에 대한 고백을 바꾸고 떠난 사람들이었어요. 그래서 요한은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4:1)고 해요. 분별의 기준은 딱 하나예요.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하는가예요.

※ 요한도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2:18)을 인정하며, 마지막 때에 나타날 대적자에 대한 가르침(살후 2:3-4 등)을 부정하지 않아요. 이 대적자를 요한계시록의 짐승과 연결해 읽는 해석도 교회사에 오래 있어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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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기기보다,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그리스도시라는 고백을 흔들림 없이 붙듭니다.
5

성경에 3:16이 두 개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한일서 3:16 · 4:8-10, 16, 19 · 요한복음 3:16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VS
요한일서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요한복음 3:16은 “작은 복음서”라고 불릴 만큼 유명하지요. 그런데 요한일서에도 3:16이 있어요. 😄 같은 요한이 쓴 두 개의 3:16이 모두 예수님의 죽음으로 보여 주신 사랑을 말해요. 우연이겠지만 참 반가운 짝이에요. 요한복음 3:16이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말한다면, 요한일서 3:16은 그 사랑을 보고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말해요.

그리고 4장에는 성경 전체에서 이곳에만 나오는 문장이 있어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4:8, 16). 요한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짧게 세 번 말해요. “하나님은 영이시니”(요 4:24), “하나님은 빛이시라”(요일 1:5),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여기서 순서가 중요해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이지, “사랑이 곧 하나님이다”가 아니에요. 사람이 느끼는 모든 사랑이 신이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이 무엇인지 정해 주시는 분이라는 거예요. 그럼 그 사랑은 어디서 볼 수 있을까요? 요한은 바로 이어서 말해요.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4:9). 사랑의 정의는 사전에 있지 않고 십자가에 있어요. 그래서 요한은 이렇게 결론 내려요.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4:19).

※ 성경의 장과 절 구분은 원래 성경에 있던 것이 아니라 13세기(장)와 16세기(절)에 붙여진 것이에요. 두 개의 3:16은 저자의 의도라기보다 반가운 우연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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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내 기분으로 정하지 않고,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사랑을 배웁니다.
6

목욕탕을 뛰쳐나온 사도,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요한일서 5:5-8 · 요한복음 19:34 · 초대교회 전승

2세기 교부 이레니우스가 전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는 이 이야기를 요한의 제자 폴리갑에게서 들은 사람들에게 들었다고 해요. 어느 날 요한이 에베소의 공중목욕탕에 목욕하러 갔는데, 안에 케린투스라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았대요. 그러자 요한은 씻지도 않고 뛰쳐나오면서 외쳤대요. “도망갑시다! 진리의 원수 케린투스가 안에 있으니 목욕탕이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 노사도의 급한 발걸음이 눈에 그려지지요.

케린투스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이레니우스에 따르면 그는 이렇게 가르쳤어요. 예수는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침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가 비둘기처럼 그에게 내려왔다가,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떠나 버렸다. 그러니까 십자가에서 고난받은 것은 사람 예수일 뿐, 그리스도는 고난받지 않았다는 거예요.

이 이야기를 알고 요한일서 5:6을 읽으면 말씀이 확 살아나요.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많은 학자들은 “물”을 요단강에서 받으신 침례로, “피”를 십자가의 죽음으로 봐요. 예수 그리스도는 침례받으실 때만 그리스도셨던 게 아니라, 십자가에서 피 흘리실 때도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셨다는 거예요. 요한은 십자가 아래에서 그것을 직접 보았어요.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 19:34). 우리를 위해 죽으신 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셨어요.

※ 목욕탕 이야기는 이레니우스의 『이단 반박』 3권 3장 4절에, 케린투스의 가르침은 1권 26장 1절에 나오는 전승이에요. 요한일서가 케린투스를 직접 겨냥했는지, “물과 피”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학자들 사이에 논의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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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며, 그 사랑 앞에 감사합니다.
7

“참 하나님” 다음에 나온
갑작스러운 마지막 한 줄

요한일서 5:13, 18-21 · 사도행전 19:23-35

요한일서의 끝은 좀 뜻밖이에요. 5장 20절에서 요한은 편지 전체를 모으는 큰 고백을 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아느니라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여기서 끝나면 딱 좋을 것 같은데, 한 줄이 더 있어요.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5:21). 😄 그리고 인사도 없이 편지가 끝나요.

왜 갑자기 우상 이야기일까요? 요한이 살던 에베소는 우상의 도시였어요.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힌 아데미 신전이 있었고, 은으로 신전 모형을 만들어 파는 장사가 크게 번성했어요. 바울 때문에 장사가 안된다며 온 도시가 소동을 일으킨 적도 있었지요(행 19:23-35). 요한의 성도들은 날마다 그런 거리를 걸어 다녔어요.

그런데 요한이 말하는 우상은 돌이나 은으로 만든 신상만이 아니에요. 바로 앞 절과 나란히 놓고 보면 뜻이 분명해져요. “참 하나님”이 아닌 것, 곧 참 하나님을 대신해 마음 한가운데 앉는 모든 것이 우상이에요. 예수님을 입맛대로 바꾼 거짓 가르침도 여기에 들어가요. 요한일서는 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편지를 맺고, 그분 대신 다른 것을 붙들지 말라는 경고로 문을 닫아요. 그리고 이 편지를 쓴 목적을 기억하게 해요.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5:13).

※ 요한일서가 에베소에서 기록되었다는 것은 요한의 에베소 사역에 관한 초대교회 전승에 근거한 견해예요. 편지 자체에는 기록 장소가 나오지 않아요.

돌아보기
내 마음 한가운데 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대신 앉아 있는 것은 없는지 돌아보고, 그분께 다시 자리를 내어 드립니다.
맺는 글
만져 본 사람이 전한 확신,
“너희에게 영생이 있다”

요한일서를 쓴 사람은 예수님을 직접 듣고, 보고, 만져 본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평생 그분을 따라 늙어 간 사람이었어요. 그가 흔들리는 성도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것은 새로운 비밀이 아니었어요. 처음부터 들은 복음, 곧 예수님이 육체로 오셨고, 우리를 위해 피 흘리셨고, 지금 아버지 앞에서 우리 편에 서 계신다는 소식이었어요.

우리는 요한처럼 예수님을 손으로 만질 수 없어요. 하지만 요한이 남긴 말씀을 통해 같은 생명을 만나요. 그리고 그 생명 안에서 확신을 얻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서 자녀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녀라 불러 주셨어요.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3:1)

※ 본문 인용은 개역개정을 기준으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