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숨은 재밌는 이야기 · 15

갈라디아서,
큰 글자로
쓴 편지

인사말도 짧게 끝내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간
바울의 가장 뜨거운 자유 선언

갈라디아서 1–6장
여는 글

바울의 편지는 보통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같은 따뜻한 감사로 시작해요. 그런데 갈라디아서에는 그 감사가 없어요. 인사가 끝나자마자 바로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1:6)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요. 편지를 받아 든 갈라디아 성도들, 첫 줄부터 좀 뜨끔했을 거예요. 😄

그 뜨거운 편지 속에 재밌는 이야기들이 숨어 있어요. 영어 단어 "history"의 뿌리가 된 보름간의 방문, 안디옥 식탁에서 벌어진 사도들의 정면충돌,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던 노예, 사라와 하갈의 뒤집힌 족보, 그리고 편지 끝에 삐뚤빼뚤 큰 글씨로 쓴 친필까지요. 그 흔적을 따라가면 한 분이 보여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이에요(2:20).

1부

갈라디아서는 어떤 책일까?

은혜의 복음을 지키려고 쓴 자유의 선언문

바울은 1차 전도여행 때 소아시아 한가운데의 갈라디아 지방에 교회들을 세웠어요(행 13–14장). 그런데 바울이 떠난 뒤 어떤 사람들이 들어와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가르쳤어요. 성도들이 흔들린다는 소식을 들은 바울은 급하게 펜을 들었어요. 이 편지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복음을 지키기 위한 바울의 가장 뜨거운 편지예요. 쓴 시기는 대략 주후 48년에서 55년 사이로 봐요.

"갈라디아"라는 이름주전 3세기에 유럽의 켈트족(갈리아 사람들)이 소아시아로 건너와 자리 잡았어요. 그래서 붙은 이름이 갈라디아예요. 프랑스의 옛 이름 "갈리아"와 뿌리가 같아요.
교회사가 사랑한 편지마르틴 루터는 "갈라디아서는 내가 약혼한 편지, 나의 아내 같은 편지"라고 했어요. 침례교 전통의 존 번연도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을 읽고 큰 위로를 얻었다고 고백했어요.

※ 갈라디아 교회들이 남쪽 지역(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인지 북쪽 켈트족 지역인지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나뉘어요. 그래서 기록 연대도 조금씩 다르게 봐요.

갈라디아서의 큰 특징 다섯 가지
1
감사 인사가 없는 편지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 가운데 인사 뒤에 감사나 찬송이 빠진 유일한 편지예요. 그만큼 급하고 절박했어요(1:6).
2
바울의 자서전
1–2장에는 다메섹 이후 아라비아, 삼 년 후 예루살렘 방문, 십사 년 후의 일까지 바울의 인생이 직접 나와요.
3
아브라함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3:6, 창 15:6). 율법보다 약속이 사백삼십 년 먼저였어요(3:17).
4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5:22-23). 많은 성도가 외우는 목록이 이 편지에 있어요.
5
친필로 쓴 큰 글자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6:11). 대필자가 받아 적다가 마지막에 바울이 직접 펜을 잡았어요.

갈라디아서의 중심에는 바울의 이 고백이 있어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2:20). 우리를 의롭게 하는 건 내가 지킨 규칙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일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외쳐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5:1).

2부

더 깊이 숨은 7가지 장면

보름간의 방문부터 큰 글자의 친필까지, 자유의 편지에 숨은 이야기들

1

천사가 와서 말해도
안 되는 복음

갈라디아서 1:6-9 · 3:1

편지의 첫 장부터 바울은 아주 센 말을 해요.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1:8). 그리고 다음 절에서 같은 말을 한 번 더 해요(1:9). 바울 자신이 와서 말을 바꿔도, 날개 달린 천사가 내려와서 말해도 안 된다는 거예요. 😄 복음은 전하는 사람의 권위가 아니라 복음 자체의 내용이 중요하다는 뜻이에요.

재밌는 건 6절과 7절에 나오는 두 개의 "다른"이에요. 한글로는 둘 다 "다른 복음"인데, 헬라어로는 단어가 달라요. 6절은 헤테로스, 곧 종류가 전혀 다른 것이고, 7절 "다른 복음은 없나니"는 알로스, 곧 같은 종류의 또 하나예요. 그러니까 바울의 말은 이래요. "너희가 따라가는 건 종류가 전혀 다른 가르침이야. 복음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두 번째 복음은 없어."

3장에서는 이렇게까지 말해요.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누가 너희를 꾀더냐"(3:1). "누가 너희한테 마법이라도 걸었냐"는 말이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눈앞에 밝히 보이듯 전해졌는데, 어떻게 거기서 눈을 돌릴 수 있냐는 거예요.

※ 6–7절의 두 단어를 뚜렷이 구별하는 해석은 여러 주석가들이 따르지만, 당시 헬라어에서 두 단어가 섞여 쓰이기도 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어요.

돌아보기
새롭고 그럴듯한 가르침보다, 처음 들었던 십자가의 복음에 붙어 있는지 돌아봅니다.
2

"history"의 뿌리가 된
보름간의 방문

갈라디아서 1:13-24 · 사도행전 9:26-28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어요.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1:17). 여기서 아라비아는 오늘의 사우디아라비아가 아니라, 다메섹 남쪽과 동쪽에 있던 나바테아 왕국을 가리켜요.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 광야에서 무엇을 했는지 성경은 자세히 말하지 않아요.

그리고 이런 말이 나와요.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1:18). 이 "방문하다"라는 헬라어가 바로 영어 history(역사)의 뿌리예요. 그냥 인사차 들른 게 아니라, 직접 만나서 묻고 듣고 알아보는 방문이라는 뜻이에요.

보름 동안 바울과 베드로는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요? 갈릴리 바닷가에서 부르신 날, 물 위를 걸었던 밤, 닭이 울던 새벽, 부활하신 주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던 아침. 예수님과 삼 년을 함께한 베드로에게서, 예수님을 박해하던 바울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을 거예요. 그렇게 보면 교회의 역사는 예수님을 전해 듣는 그 보름에서부터 이어진 셈이에요.

※ "방문하다"라는 단어와 history의 어원 관계는 사실이지만, 보름 동안 두 사람이 나눈 대화 내용은 성경에 나오지 않아요. 위의 대화 장면은 추정이에요.

돌아보기
다른 사람의 신앙 경험보다 먼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배우는 시간을 갖습니다.
3

안디옥 식탁에서 벌어진
사도들의 정면충돌

갈라디아서 2:11-16 · 사도행전 10:9-16 · 베드로후서 3:15
욥바의 베드로 (행 10장)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환상을 세 번 보았어요.
VS
안디옥의 베드로 (갈 2장)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오자 이방인과 먹던 식탁에서 슬그머니 물러났어요.

안디옥 교회에서는 유대인 성도와 이방인 성도가 한 식탁에서 함께 밥을 먹었어요. 베드로도 그랬어요. 그런데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사람들이 도착하자, 베드로는 그들의 눈치를 보며 이방인들과의 식탁에서 떠났어요(2:12). 다른 유대인들도 따라 했고, 심지어 이방인 선교의 동역자였던 바나바마저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2:13).

베드로는 누구보다 이 일을 잘 알던 사람이에요. 몇 해 전 욥바의 지붕 위에서 부정한 짐승이 담긴 보자기 환상을 세 번이나 보았고, 그 뒤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거든요(행 10장). 그러니 바울은 참지 않았어요.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2:11). 뒤에서 수군거린 게 아니라 모든 사람 앞에서 얼굴을 맞대고 말했어요.

그 이유는 밥상 예절이 아니라 복음이었어요. 누구와 함께 먹느냐가 곧 "사람이 무엇으로 의롭게 되느냐"를 보여 주거든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2:16).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아요. 세월이 흐른 뒤, 베드로는 자기 편지에서 바울을 이렇게 불러요.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벧후 3:15). 얼굴을 붉히며 부딪쳤던 두 사도가 끝까지 한 복음 안에서 형제로 남은 거예요. 😄

돌아보기
복음 앞에서 사람의 눈치를 보며 물러서는 나를 돌아보고, 부딪친 뒤에도 형제를 형제로 부르게 하시는 은혜를 기억합니다.
4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던
노예, 율법

갈라디아서 3:15-4:7
초등교사 아래
학교 가는 길을 지키는 엄한 보호자 아래 있는 어린아이
VS
아들의 영을 받은 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상속자

바울은 율법을 이렇게 설명해요.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3:24). 옛 번역으로는 "몽학선생"이에요. 그런데 이 사람은 사실 선생님이 아니었어요. 로마 시대의 넉넉한 집에서는 노예 한 사람을 붙여서 아이를 학교까지 데려다주고, 숙제와 행동을 감시하게 했어요. 그 노예가 바로 파이다고고스예요.

이 보호자는 꽤 엄했어요. 잘못하면 회초리도 들었죠. 아이에게는 고마우면서도 무서운 사람이었을 거예요. 😄 하지만 아이가 자라서 성인이 되면 더 이상 보호자가 따라다니지 않아요. 바울의 말이 바로 그거예요.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3:25). 율법은 나쁜 것이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께 데려다주는 역할을 한 거예요.

그리고 바울은 약속의 날을 이렇게 말해요.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4:4). 그리고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에 보내셔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어요(4:6). "아빠"는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쓰신 아람어 그대로예요(막 14:36). 감시받던 아이가, 아버지 품에 안기는 아들이 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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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을 지켜야 인정받는 아이처럼 살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로 삽니다.
5

사라와 하갈,
뒤집힌 족보

갈라디아서 4:21-31 · 창세기 16장, 21:1-10

갈라디아 성도들을 흔들던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말했을 거예요. "우리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진짜 자손이야. 할례를 받아야 이삭 쪽에 서는 거라고." 그런데 바울은 그 이야기를 완전히 뒤집어서 들려줘요.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어요. 여종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과, 약속을 따라 사라에게서 난 이삭이에요. 바울은 이 두 여인이 두 언약을 보여 준다고 해요. 그리고 깜짝 놀랄 말을 해요.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4:25). 율법을 받은 시내 산을 여종 하갈 쪽에 세운 거예요.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사람은 핏줄은 사라의 자손이어도 실은 종의 자리에 서 있다는 거죠. 유대인 듣기에는 정말 충격적인 말이었어요.

반대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삭 쪽이에요.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4:26).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4:28).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 성도들이, 약속의 아들 이삭의 형제가 된 거예요. 족보를 정하는 건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에요.

※ 바울이 1장 17절에서 다녀온 "아라비아"와 4장 25절의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을 연결해서, 바울이 그때 시내 산 근처를 찾아갔을 거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어요. 확실한 근거가 있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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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엇을 지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자녀가 되었음을 기억하며, 종의 마음이 아닌 자녀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6

육체의 일은 여럿,
성령의 열매는 하나

갈라디아서 5:16-26
육체의 일 (5:19-21)
음행부터 방탕함까지 열다섯 가지를 나열하고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덧붙여요. "일"은 복수예요.
VS
성령의 열매 (5:22-23)
사랑부터 절제까지 아홉 가지인데, "열매"는 단수예요.

5장에는 두 개의 목록이 나란히 나와요. 하나는 "육체의 일"이고, 하나는 "성령의 열매"예요. 그런데 헬라어로 읽으면 재밌는 차이가 보여요. 육체의 "일"은 복수로 쓰였는데, 성령의 "열매"는 단수로 쓰였어요. "열매들"이 아니라 "열매"예요.

육체의 일은 서로 따로 놀아요.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열함… 사람을 쪼개고 흩어 놓죠. 그런데 성령의 열매는 한 송이 포도처럼 붙어 있어요. 사랑은 있는데 오래 참음은 없는 열매, 희락은 있는데 온유는 없는 열매는 없다는 거예요. 성령님이 맺으시는 열매는 한 분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가는 하나의 열매예요.

그리고 목록 끝에 바울은 살짝 웃음이 나는 한 마디를 붙여요.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5:23). 😄 율법 이야기로 다투던 사람들에게, "사랑하고 온유한 걸 막는 법은 세상 어디에도 없지 않냐"고 말하는 거예요. 열매는 억지로 붙여서 맺히는 게 아니라 나무에 붙어 있을 때 맺혀요.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5:25).

돌아보기
아홉 가지를 하나씩 애써 채우려 하기보다, 성령님을 따라 걸으며 그리스도를 닮은 한 송이 열매가 맺히기를 구합니다.
7

삐뚤빼뚤 큰 글자와
몸에 새긴 흔적

갈라디아서 4:13-15 · 6:11-18

바울은 편지를 대개 대필자에게 받아 적게 했어요. 로마서에는 대필자 더디오가 직접 인사를 남기기도 했죠(롬 16:22). 그리고 편지 끝에는 바울이 직접 펜을 들어 몇 줄을 써서, 진짜 자기 편지라는 표시를 했어요(살후 3:17). 그런데 갈라디아서에서는 이렇게 말해요.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6:11).

왜 큰 글자였을까요? 가장 가슴 아픈 추측은 눈이에요. 바울은 갈라디아에 처음 갔을 때 "육체의 약함으로" 복음을 전했다고 하고(4:13), 성도들이 할 수만 있었다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4:15)고 해요. 눈이 나빠서 글씨가 커졌을 수도 있어요. 아니면 중요한 말에 밑줄을 긋듯, 일부러 크고 굵게 쓴 것일 수도 있고요.

그리고 편지는 이 말로 끝나요.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6:17). 그 시대 노예의 몸에는 주인의 이름을 낙인으로 찍기도 했어요. 할례를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매 맞고 돌에 맞은 몸의 상처를 보여 줘요. 그리고 고백해요.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6:14).

※ 바울이 큰 글자를 쓴 이유와, 4장의 "육체의 약함"이 눈병이었는지는 성경이 분명히 말하지 않아요. 여러 추측 가운데 하나예요.

돌아보기
몸에 할례를 새기는 대신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살았던 바울처럼, 내 삶의 자랑을 십자가 하나에 둡니다.
맺는 글
율법의 멍에를 벗기신 분,
나를 위해 자신을 버리신 그리스도

갈라디아서는 감사 인사도 건너뛸 만큼 급한 편지였어요. 천사가 와도 안 된다고, 사도의 얼굴 앞에서라도 할 말은 해야 한다고, 율법은 우리를 데려다준 보호자였을 뿐이라고 바울은 온 힘을 다해 외쳐요. 그리고 마지막에는 큰 글자로 직접 서명까지 했어요.

그렇게 지키려 한 건 바울 자신의 체면이 아니라 은혜의 복음이었어요. 우리가 무엇을 더해야 완성되는 복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복음이요. 그래서 이 편지는 오늘도 규칙과 눈치에 지친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언해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5:1)

※ 본문 인용은 개역개정을 기준으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