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숨은 재밌는 이야기 · 11

요한복음,
태초로
거슬러 올라간 복음

사랑받은 제자가 남긴,
믿고 생명을 얻게 하려고 쓴 표적 이야기

요한복음 1–21장
여는 글

마태복음은 족보로, 마가복음은 침례 요한으로, 누가복음은 성전의 제사장으로 이야기를 시작해요. 그런데 요한복음은 베들레헴보다, 아브라함보다 훨씬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요. 첫 마디가 "태초에"거든요. 창세기 첫 줄과 똑같은 말로, 세상이 있기 전부터 계신 분을 소개하면서 시작하는 책이에요.

그래서 요한복음은 쉬운 말로 쓰였는데도 깊이가 끝이 없는 책이에요. 어린아이도 읽을 수 있는 짧은 문장 속에 창세기와 출애굽기가 겹쳐 있고, 한 단어가 두 가지 뜻으로 읽히고, 앞에서 흘린 작은 단서가 뒤에서 다시 나타나요. 그 흔적을 따라가면 한 분이 보여요. 태초부터 계셨고, 우리 곁에 오셔서, "내가 그니라" 말씀하시는 예수님이요.

1부

요한복음은 어떤 책일까?

사랑받은 제자가 오랜 세월 곱씹은 끝에 남긴 복음서

요한복음에도 저자 이름은 나오지 않아요. 대신 책 끝에 이런 말이 있어요.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21:24). 여기서 "이 사람"은 책 곳곳에 나오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예요(21:20). 초대교회는 이 제자를 세베대의 아들 사도 요한으로 전해 왔어요. 2세기의 교부 이레네우스는 요한이 소아시아의 에베소에 머물 때 이 복음서를 펴냈다고 기록했어요. 마태·마가·누가복음이 이미 교회에 퍼진 뒤, 나이 든 사도가 평생 곱씹은 예수님을 가장 깊은 자리에서 다시 들려준 책인 셈이에요.

"사랑하시는 그 제자"이 제자는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았고(13:23),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님의 어머니를 부탁받았고(19:26-27), 빈 무덤으로 베드로보다 먼저 달려갔어요(20:2-4). 끝까지 자기 이름 대신 "사랑받은 사람"으로만 불렸어요.
손바닥만 한 종잇조각이집트에서 나온 파피루스 조각 하나가 영국 맨체스터의 존 라이랜즈 도서관에 있어요. 신약성경 사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꼽히는 조각인데, 거기 적힌 본문이 요한복음 18장,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18:38)고 묻는 장면이에요.

※ "사랑하시는 제자"를 사도 요한으로 보는 것은 초대교회의 전승이고, 학자들 사이에는 다른 견해들도 있어요. 기록 연대는 대략 1세기 후반(90년대 무렵)으로 보는 견해가 많아요. 라이랜즈 파피루스(P52)는 흔히 2세기 전반의 것으로 보지만, 정확한 연대에 대해서는 논의가 있어요.

요한복음의 큰 특징 다섯 가지
1
"기적" 대신 "표적"
요한은 예수님의 이적을 "표적", 곧 무언가를 가리키는 표지판이라고 불러요. 가나의 물이 "처음 표적"(2:11), 왕의 신하 아들을 고치신 일이 "두 번째 표적"(4:54)이에요.
2
일곱 번의 "나는 ~이다"
생명의 떡(6:35), 세상의 빛(8:12), 양의 문(10:7), 선한 목자(10:11), 부활이요 생명(11:25), 길이요 진리요 생명(14:6), 참포도나무(15:1). 모두 요한복음에만 있는 말씀이에요.
3
한 사람과의 긴 대화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3장),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4장),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9장). 요한은 예수님이 한 사람과 오래 이야기하시는 장면을 즐겨 적었어요.
4
세 번의 유월절
요한복음에는 유월절이 세 번 나와요(2:13, 6:4, 11:55). 예수님의 공생애를 3년쯤으로 보는 것도 이 기록 덕분이에요.
5
다락방의 긴 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부터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로 시작하는 긴 기도까지(13–17장). 마지막 밤의 이야기가 다섯 장에 걸쳐 이어져요.

요한은 이 책을 왜 썼는지 직접 밝혀 두었어요.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20:31). 일곱 표적도, 일곱 번의 "나는 ~이다"도, 모두 한 곳을 가리키는 표지판이에요. 예수님을 믿고 생명을 얻으라는 거예요.

2부

더 깊이 숨은 7가지 장면

태초의 말씀부터 갈릴리 바닷가의 숯불까지, 요한이 숨겨 둔 이야기들

1

창세기를 다시 쓰고,
우리 곁에 장막을 치신 말씀

요한복음 1:1-14 · 창세기 1:1-5 · 출애굽기 40:34
창세기 1:1, 3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VS
요한복음 1:1, 5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한복음 첫 줄은 창세기 첫 줄을 일부러 따라 불러요. 헬라어 구약(칠십인역)의 창세기 1:1과 요한복음 1:1은 똑같은 두 단어로 시작하거든요. 그리고 창세기처럼 "말씀", "빛", "어둠", "생명"이 차례로 나와요.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자 세상이 생겼는데, 요한은 바로 그 말씀이 한 인격이셨다고 말해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1:3).

요한이 고른 단어는 로고스예요. 헬라 철학을 아는 사람도, 구약을 아는 유대인도 이 단어를 들으면 귀가 번쩍 뜨였을 거예요. 요한은 두 세계 사람 모두에게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찾던 그 말씀이 바로 이분이에요."

그리고 놀라운 한 문장이 나와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1:14). 여기 쓰인 동사는 원래 "장막을 치다"라는 뜻이에요. 광야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한가운데 성막을 치고 머무셨던 것처럼요. 성막이 완성되던 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했는데(출 40:34), 요한은 이어서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1:14)라고 써요. 천막 안에 머물던 그 영광을, 이제는 한 사람의 얼굴에서 보았다는 거예요.

돌아보기
세상을 지으신 말씀이 내 곁에 장막을 치고 머무실 만큼 가까이 오셨음을 기억합니다.
2

정결 예식의 돌항아리가
잔치의 포도주로

요한복음 2:1-11 · 출애굽기 7:20
모세의 첫 재앙 (출 7장)
나일강 물을 쳐서 피로 바꾸었어요. 심판의 시작이었어요.
VS
예수님의 첫 표적 (요 2장)
항아리의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어요. 잔치의 시작이었어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어요. 그 시대 잔치는 일주일씩 이어지기도 했으니, 포도주가 떨어진 건 신랑 집안에 두고두고 창피한 일이었어요. 이때 요한은 한 가지를 꼭 짚어 줘요. 거기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여 있었다고요(2:6).

왜 하필 돌항아리였을까요? 유대 전통에서 흙으로 빚은 그릇은 부정해지면 깨뜨려야 했지만, 돌그릇은 부정을 타지 않는다고 여겼거든요.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예수님 시대 갈릴리와 예루살렘 곳곳에서 이런 돌그릇들을 많이 찾아냈어요. 손을 씻고 몸을 깨끗하게 하는 물을 담아 두던 항아리였던 거예요. 한 "통"은 메트레테스로 약 39리터니까, 여섯 항아리를 아귀까지 채우면 500리터가 훌쩍 넘어요. 잔치 손님들이 아무리 마셔도 모자랄 수 없는 양이에요. 😄

연회장은 맛을 보고 신랑을 불러 말해요.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2:10). 몸을 씻던 물이 기쁨의 포도주가 됐어요. 율법의 정결 예식이 가리키던 것이, 예수님 안에서 잔치로 채워진 것이에요. 가장 좋은 것은 뒤에 왔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2:4). 이 "때"는 책 전체를 따라 흘러가다가, 십자가를 앞두고 비로소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12:23)로 터져 나와요. 가나의 포도주는 십자가에서 이루어질 기쁨의 맛보기였던 거예요.

※ 모세의 첫 재앙과 예수님의 첫 표적을 나란히 읽는 것은 여러 주석가들의 해석이에요. 돌그릇이 부정을 타지 않는다는 규정은 후대 유대 문헌(미쉬나)에 정리되어 있어요.

돌아보기
내 힘으로 깨끗해지려 애쓰던 빈 항아리 같은 삶을, 가장 좋은 것을 끝에 두시는 예수님께 맡깁니다.
3

땅속에서 나온
"다섯 행각"의 연못

요한복음 5:1-9

요한은 장소를 참 꼼꼼하게 적어요.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5:2). 행각은 지붕이 있는 기둥 복도예요. 그런데 연못에 복도가 다섯이라니, 좀 이상하죠? 네모난 연못이면 넷이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한때 어떤 학자들은 이 다섯 행각을 모세오경 다섯 권을 가리키는 상징으로, 요한이 지어낸 풍경쯤으로 보기도 했어요.

그런데 19세기 말부터 예루살렘 옛 성 북동쪽, 성 안나 교회 근처를 발굴하면서 커다란 연못 터가 드러났어요.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연못이 붙어 있고, 그 사이를 둑이 가로지르는 구조였어요. 네 변에 복도가 하나씩, 그리고 가운데 둑 위에 하나. 합치면 다섯이에요. 😄 요한이 상상으로 쓴 게 아니라, 거기 가 본 사람이 본 대로 적은 거였어요.

그 복도에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누워 있었어요(5:5). 예수님이 물으셨어요. "네가 낫고자 하느냐"(5:6). 그런데 그의 대답은 "네"가 아니었어요.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5:7). 38년 동안 그가 기다린 건 자기를 물에 넣어 줄 누군가였어요.

예수님은 그를 물로 데려가지 않으셨어요.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5:8). 그가 기다리던 "그 사람"이 바로 눈앞에 계셨던 거예요. 연못도, 물의 움직임도, 먼저 뛰어들 힘도 필요 없었어요.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면 충분했어요.

※ 발굴된 연못이 요한복음 5장의 베데스다라는 데는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지만, 다섯 행각이 정확히 어떻게 배치되었는지는 논의가 있어요. "베데스다"라는 이름도 사본마다 조금씩 다르게 적혀 있어요.

돌아보기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고 누워 있던 자리에서, 이미 내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납니다.
4

밤에 온 선생과
대낮에 온 여인

요한복음 3:1-15 · 4:5-42 · 7:50-51 · 19:39
3장 · 니고데모
이름이 있는 유대 지도자, 이스라엘의 선생. 밤에 찾아왔어요.
VS
4장 · 사마리아 여인
이름 없는 사마리아 여인, 따가운 눈총을 받던 사람. 여섯 시쯤, 한낮에 우물에 왔어요.

요한은 두 만남을 나란히 붙여 놓았어요. 한 사람은 모두가 존경하는 바리새인 니고데모고, 한 사람은 모두가 피하는 사마리아 여인이에요. 그런데 먼저 믿음을 고백하고 온 동네에 "와서 보라"(4:29) 외친 사람은 여인 쪽이었어요. 물동이까지 버려두고 달려갔죠(4:28).

니고데모와의 대화에는 말놀이가 숨어 있어요. 예수님이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3:3)이라고 하셨을 때 쓰신 아노텐은 "다시"라는 뜻도 되고 "위로부터"라는 뜻도 돼요. 니고데모는 "다시"로만 알아듣고 이렇게 되물어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3:4). 😄 예수님은 사람이 한 번 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새로 태어나는 것을 말씀하신 거예요.

그날 밤 니고데모는 알쏭달쏭한 얼굴로 돌아갔어요. 그런데 요한은 그를 잊지 않고 두 번 더 등장시켜요. 7장에서는 예수님을 잡으려는 동료들 앞에서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 심판하느냐"(7:51)며 조심스럽게 편을 들어요. 그리고 19장, 모두가 도망간 십자가 뒤에 그가 나타나요.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19:39). 백 리트라는 30킬로그램이 넘는, 왕의 장례에나 쓸 만한 양이에요.

밤에 몰래 왔던 사람이, 예수님이 가장 초라해 보이던 날 모두가 보는 앞에 나선 거예요. 요한은 한 사람의 믿음이 밤에서 대낮으로 천천히 걸어 나오는 길을 세 장면으로 보여 주었어요.

돌아보기
아직 알쏭달쏭한 믿음이라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앞에서, 오늘 한 걸음 더 빛 가운데로 나아갑니다.
5

"보냄을 받았다"는 못에서
눈을 뜬 사람

요한복음 9:1-41

예수님은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의 눈에 진흙을 바르시고 말씀하셨어요.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그리고 요한은 친절하게 괄호를 달아 줘요.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9:7). 굳이 이 뜻을 풀어 준 이유가 있어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스무 번이 넘게 "나를 보내신 이"와 함께 소개하시거든요. 바로 앞 절에서도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9:4)고 하셨어요. 그 사람은 "보냄 받은" 못에서, 보냄 받은 분을 만나 눈을 뜬 거예요.

이 실로암 못은 2004년, 예루살렘 옛 다윗성 남쪽에서 하수관 공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됐어요. 넓은 돌계단이 층층이 내려가는 큰 연못인데, 예수님 시대의 것으로 보여요. 공사하던 인부들이 계단을 파내다가 성경 속 장소를 찾아낸 거예요.

그런데 이 장에는 더 재밌는 흐름이 있어요. 눈을 뜬 사람이 예수님을 부르는 이름이 점점 달라져요.

9:11"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9:17"선지자니이다"
9:33"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9:38"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바리새인들이 캐물을수록 그의 고백은 더 또렷해졌어요. 같은 질문을 자꾸 하니까 이렇게 되묻기까지 해요.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9:27). 😄 결국 그는 회당에서 쫓겨났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쫓겨난 그를 다시 찾아오셨어요(9:35). 눈을 뜬 사람은 예수님을 보았고, 스스로 본다고 하던 사람들은 도리어 보지 못했어요(9:39-41).

※ 2004년에 발견된 연못이 요한복음 9장의 실로암 못이라는 것은 발굴자들과 많은 학자들의 견해예요. 연못의 정확한 쓰임새에 대해서는 논의가 있어요.

돌아보기
"예수라 하는 그 사람"에서 "주여 내가 믿나이다"까지, 나를 끝까지 찾아와 눈을 열어 주신 예수님을 고백합니다.
6

"내가 그니라" 한마디에
땅에 엎드러진 군대

요한복음 8:58-59 · 18:3-6 · 출애굽기 3:14

떨기나무 불꽃 앞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을 때,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 3:14)고 대답하셨어요. 헬라어 구약은 이 말씀을 에고 에이미, 곧 "내가 있다"로 시작해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나는 생명의 떡이라", "나는 세상의 빛이라" 하실 때도 똑같이 이 말로 시작하세요.

그리고 가끔은 아무것도 붙이지 않고 그냥 "내가 있다"고만 하셨어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8:58). 듣던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아들었어요. 그래서 곧바로 돌을 들어 치려고 했어요(8:59). 하나님의 이름을 자기에게 쓰신다고 여긴 거예요.

이 말이 가장 극적으로 울린 곳은 겟세마네 동산이에요. 가룟 유다가 "군대와 …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들고 왔어요(18:3). 세상의 빛을 잡으러 오면서 횃불을 들고 온 거예요. 😄 예수님이 "누구를 찾느냐" 물으시자 그들이 "나사렛 예수라" 했고, 예수님은 대답하셨어요. "내가 그니라." 이 말도 원문으로는 "에고 에이미"예요. 그러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18:6).

잡으러 온 사람들이 오히려 먼저 땅에 엎드렸어요. 요한은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힘이 없어서 잡혀가신 게 아니다, 스스로 있는 분이 스스로 가신 것이다. "내가 목숨을 버리는 것은 … 아무도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10:17-18)고 하신 그대로요.

돌아보기
나를 위해 스스로 그 밤에 걸어 나가신 "스스로 있는 분" 앞에, 두려움 대신 경배로 엎드립니다.
7

숯불 곁에서 무너지고
숯불 곁에서 다시 서다

요한복음 18:15-27 · 21:1-19
18장 · 대제사장의 뜰
추운 밤, 숯불을 쬐며 세 번 "나는 아니라" 말했어요.
VS
21장 · 갈릴리 바닷가
새벽, 숯불 곁에서 세 번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고백했어요.

예수님이 잡혀가시던 밤, 베드로는 대제사장 집 뜰에서 종들 틈에 끼어 불을 쬐고 있었어요. 요한은 그 불이 숯불이었다고 적어요(18:18). 그리고 그 숯불 곁에서 베드로는 세 번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어요.

부활하신 뒤, 밤새 한 마리도 못 잡은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돌아왔을 때, 바닷가에 또 숯불이 피워져 있었어요.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21:9). 이 "숯불"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딱 이 두 장면에만 나와요. 베드로는 숯 타는 냄새를 맡으며 그 밤을 떠올리지 않았을까요?

아침을 먹은 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셨어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21:15-17). 세 번 무너졌던 사람에게 세 번 고백할 기회를 주신 거예요. 그리고 세 번 모두 같은 일을 맡기셨어요.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은 실패한 베드로를 버리지 않으시고, 바로 그 숯불 곁에서 다시 목자로 세우셨어요.

그날 잡은 물고기는 "백쉰세 마리"였어요(21:11). 누가 세었는지 참 꼼꼼하죠. 😄 이 숫자에 무슨 뜻이 숨어 있는지 옛날부터 해석이 무성했지만, 요한이 분명히 적은 건 따로 있어요.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그리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은, 처음 빌립을 부르실 때(1:43)와 똑같아요. "나를 따르라"(21:19).

※ 21장의 세 질문에서 "사랑하다"에 쓰인 두 헬라어 단어(아가파오와 필레오)의 차이를 크게 볼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나뉘어요. 153이라는 숫자에 대한 여러 해석(예를 들어 당시 알려진 물고기 종류의 수라는 설)도 모두 추정이에요. 베드로가 로마에서 십자가에 달려 순교했다는 것은 초대교회의 전승이에요(21:18-19 참조).

돌아보기
내가 무너졌던 바로 그 자리로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예수님께 다시 대답하고 따라갑니다.
맺는 글
"태초에"로 시작해
"세상이라도 부족할 책"으로

요한복음은 세상이 생기기 전, 태초에 계신 말씀으로 시작해요. 그 말씀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고, 누워 있던 사람을 일으키셨고, 맹인의 눈을 여셨고, 스스로 십자가로 걸어가셨고, 무너진 제자를 숯불 곁에서 다시 세우셨어요.

그리고 요한은 이렇게 끝을 맺어요.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그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21:25). 평생 예수님을 곱씹은 사도도 다 쓰지 못했다고 고백한 거예요. 😄 그러니 요한복음은 끝난 책이 아니라 초대장이에요.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했던 말처럼요. "와서 보라"(1:4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16)

※ 본문 인용은 개역개정을 기준으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