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숨은 재밌는 이야기 · 10

누가복음,
잃은 사람을
찾아 나선 복음

의사 누가가 차례대로 받아 적은,
잃은 사람을 끝까지 찾아오시는 예수님 이야기

누가복음 1–24장
여는 글

누가복음은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들이 모여 있는 책이에요. 구유에 누운 아기와 들판의 목자들,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본 사마리아 사람, 집 나갔다 돌아온 아들을 달려가 안아 주는 아버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키 작은 삭개오까지. 이 이야기들은 모두 누가복음에만 나와요. 누가가 없었다면 우리 성탄절도, 우리 설교 예화도 꽤 쓸쓸했을 거예요. 😄

그런데 누가는 그냥 좋은 이야기를 모아 둔 사람이 아니에요. 로마 황제의 비문과 나란히 놓고 읽어야 보이는 말, 구약의 노래를 다시 부르는 찬송, 책 전체에 흩어 놓은 "오늘"이라는 단어, 창세기 3장을 떠올리게 하는 한 문장까지 곳곳에 숨겨 두었어요. 그 흔적을 따라가면 한 분이 보여요.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 끝까지 오시는 예수님이요.

1부

누가복음은 어떤 책일까?

의사가 조사해서 차례대로 쓴, 두 권짜리 이야기의 첫 권

누가복음에도 저자 이름은 없지만, 초대교회는 이 책과 사도행전을 바울의 동역자 의사 누가가 쓴 것으로 한결같이 전해 왔어요. 누가는 처음부터 이렇게 밝혀요. 자기는 목격자가 아니지만, 처음부터 목격한 사람들이 전해 준 것을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뒤 "차례대로" 쓴다고요(1:2-3). 조사하고 정리해서 쓴 역사가의 복음서인 셈이에요. 그래서 누가복음은 네 복음서 가운데 가장 길고, 사도행전과 합치면 신약성경 전체의 4분의 1이 넘는 분량이 돼요.

누가는 누구일까?바울은 그를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라고 불렀어요(골 4:14). 바울의 마지막 편지에는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라는 말이 있어요(딤후 4:11). 감옥까지 끝까지 곁을 지킨 사람이에요.
데오빌로 각하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둘 다 "데오빌로"에게 보낸 책이에요(1:3, 행 1:1). 이름의 뜻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각하"는 사도행전에서 총독 벨릭스와 베스도를 부를 때 쓴 존칭이에요(행 23:26, 26:25).

※ 골로새서 4장에서 바울이 "할례파" 동역자들을 따로 소개한 뒤에 누가를 부르기 때문에(골 4:10-14), 누가가 이방인이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아요. 데오빌로가 실제 고위 인물이었는지, 믿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이름인지도 논의가 있어요. 기록 연대는 대략 60년대에서 80년대 사이로 보는 견해들이 있어요.

누가복음의 큰 특징 다섯 가지
1
누가만 들려주는 비유
선한 사마리아인, 돌아온 아들, 부자와 나사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모두 누가복음에만 있는 비유예요.
2
기도하시는 예수님
침례를 받고 기도하실 때 하늘이 열리고(3:21), 열두 제자를 뽑기 전 밤새 기도하시고(6:12), 기도하실 때 얼굴 모습이 변하셨어요(9:29). 모두 누가가 짚어 준 기도예요.
3
가장자리에 선 사람들
목자, 과부, 세리, 사마리아인, 그리고 여인들. 예수님 일행을 자기 재산으로 섬긴 여인들의 이름도 누가만 적었어요(8:1-3).
4
예루살렘을 향한 긴 여행
9장 51절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그 뒤 열 장 가까이 여행길 이야기가 이어져요.
5
노래로 시작하는 책
1–2장에만 찬송이 네 편 나와요. 마리아, 사가랴, 천사들, 시므온의 노래예요. 누가복음은 기쁨과 찬송이 넘치는 책이에요.

누가복음의 핵심은 삭개오의 집에서 하신 한 마디에 담겨 있어요.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9:10). 양 한 마리, 드라크마 하나, 집 나간 아들 하나, 나무 위의 세리, 십자가 위의 강도까지. 누가는 예수님이 한 사람을 찾아 끝까지 가시는 분이라고 말해요.

2부

더 깊이 숨은 7가지 장면

마리아의 노래부터 엠마오의 저녁 식탁까지, 누가가 숨겨 둔 이야기들

1

천 년 전 한나의 노래를
이어 부른 마리아

누가복음 1:46-55 · 사무엘상 2:1-10
한나의 노래 (삼상 2장)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VS
마리아의 노래 (눅 1장)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천사의 소식을 들은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찾아가 노래를 불러요(1:46-55). 그런데 이 노래를 가만히 읽어 보면 어디서 많이 들은 가락이에요. 사무엘을 낳은 뒤 한나가 부른 노래(삼상 2:1-10)와 흐름이 아주 닮았거든요.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해 울던 여인이었고, 마리아는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시골 처녀였어요. 둘 다 사람들이 보기에 "아무것도 아닌" 자리에 있었어요. 그런데 두 노래 모두 똑같은 하나님을 찬양해요. 높은 자를 낮추시고 낮은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이요. 한나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 2:7)라고 노래했고, 마리아는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1:52)라고 노래했어요.

한나의 아들 사무엘은 이스라엘에 왕을 세운 사람이 됐어요. 그리고 한나의 노래는 하나님이 세우실 왕,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높이실 것이라는 고백으로 끝나요(삼상 2:10). 천 년쯤 뒤, 마리아는 바로 그 기름 부음 받은 왕, 그리스도를 품고 이 노래를 이어 부른 거예요.

누가복음 1–2장의 네 노래는 교회에서 라틴어 첫 단어로 불려 왔어요. 마리아의 노래는 "마그니피캇", 사가랴의 노래는 "베네딕투스", 천사들의 노래는 "글로리아", 시므온의 노래는 "눙크 디미티스"예요. 교회는 오랜 세월 이 노래들을 기도 시간마다 불렀고, 바흐 같은 음악가들도 이 가사로 곡을 지었어요. 시골 처녀의 노래가 온 세계 교회의 찬송이 된 거예요.

돌아보기
내가 보잘것없다고 느끼는 자리에서도, 비천한 사람을 돌아보시는 하나님을 마리아처럼 찬양합니다.
2

황제의 "복음"과
구유에 누운 "구주"

누가복음 2:1-14
프리에네 비문 (주전 9년)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구주"라 부르고, 그의 생일이 세상에 "좋은 소식"의 시작이 되었다고 새겼어요.
VS
누가복음 2:10-11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누가는 성탄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해요.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2:1). 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의 첫 황제 아우구스투스예요. 한마디 명령으로 온 세상 사람을 움직이던 사람이죠.

오늘날 튀르키예 서쪽의 옛 도시 프리에네에서 발견된 돌비석에는,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몇 해 전인 주전 9년 무렵 새긴 글이 남아 있어요. 거기서 아우구스투스는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가져온 "구주"로 불리고, 그가 태어난 날은 세상에 유앙겔리온, 곧 "좋은 소식"의 시작이 되었다고 새겨져 있어요.

그러니까 누가복음 2장의 천사는 로마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황제의 단어들을 그대로 가져다 쓴 거예요. 좋은 소식, 구주, 주, 그리고 "땅에서는 … 평화"(2:14)까지요. 그런데 그 소식이 전해진 곳은 황궁이 아니라 밤에 양을 치던 들판이었고, 표적은 황금 관이 아니라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2:12)였어요.

황제는 로마에 앉아 세금을 걷으려고 호적을 명령했어요. 그런데 바로 그 명령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는 베들레헴까지 가게 됐고, 미가 선지자의 예언(미 5:2)이 이루어졌어요. 세상의 왕이 자기 뜻대로 명령한다고 생각한 그 순간에도, 역사를 움직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셨어요.

※ 누가복음 2:2에 나오는 "구레뇨" 총독 시절의 호적이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역사 기록과 맞추는 문제로 학자들 사이에 오래 논의가 있어요.

돌아보기
세상이 "좋은 소식"이라고 외치는 것들 사이에서, 구유에 오신 예수님만이 참된 구주이심을 고백합니다.
3

일곱 사람의 이름으로
날짜를 새긴 역사가

누가복음 3:1-2

침례 요한이 사역을 시작하는 장면에서 누가는 달력 대신 이름을 줄줄이 적어요. 디베료 황제, 총독 본디오 빌라도, 분봉 왕 헤롯과 빌립과 루사니아,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3:1-2). 무려 일곱 사람이에요. 복음서 가운데 이렇게 연도를 꼼꼼하게 박아 둔 곳은 여기뿐이에요.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요? 누가는 "이건 옛날 옛적 어느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예요. 로마 황제가 누구였고, 유대 총독이 누구였고, 대제사장이 누구였을 때, 바로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의 요한에게 임했다는 거예요(3:2). 누구든지 찾아가 확인해 볼 수 있는 역사 한가운데서 일어난 일이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땅속에서 이 이름들이 하나씩 나오고 있어요. 1961년 지중해 해변 도시 가이사랴의 옛 극장 터에서 돌 하나가 발견됐는데, 거기에 라틴어로 "유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어요. 성경 밖에서 빌라도의 이름을 새긴 비문이 처음으로 나온 거예요. 1990년에는 예루살렘에서 "가야바의 아들 요셉"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유골함도 발견됐어요.

한때는 루사니아 때문에 누가가 틀렸다는 말도 있었어요. 역사가 요세푸스가 기록한 루사니아는 예수님 시대보다 60여 년 앞서 죽은 사람이었거든요. 그런데 아빌레네 지방의 옛 도시 아빌라에서 "분봉 왕 루사니아"라는 이름이 들어간 비문이 발견되면서, 같은 이름의 다른 통치자가 있었을 가능성이 커졌어요. 누가를 성급하게 틀렸다고 했던 사람들이 머쓱해진 셈이에요. 😄

※ 디베료 황제 "열다섯 해"를 언제부터 세느냐에 따라 대략 주후 28–29년 무렵으로 봐요. 가야바 유골함이 대제사장 가야바의 것인지, 아빌라 비문이 언제 새겨졌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논의가 있어요.

돌아보기
내 믿음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역사 속에 오신 예수님 위에 서 있음을 기억합니다.
4

"누가 내 이웃입니까"를
뒤집으신 예수님

누가복음 9:51-56 · 10:25-37
율법교사의 질문 (10:29)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VS
예수님의 질문 (10:36)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바로 한 장 앞에 재미있는 장면이 있어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 마을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렇게 말해요.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9:54). 과연 "우레의 아들"다워요. 😄 예수님은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어요.

그런데 조금 뒤,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그 사마리아 사람이에요. 제자들이 불로 태워 버리고 싶어 하던 바로 그 사람들이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약 1,000미터를 내려가는 험한 골짜기 길이라 강도가 많기로 유명했어요. 제사장과 레위인은 피해 지나갔고, 사마리아 사람은 멈춰 서서 상처를 싸매고, 주막에 데려가고, 자기 돈 두 데나리온까지 내놓았어요(10:35). 두 데나리온은 일꾼 이틀 품삯이에요.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물었어요.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10:29) 어디까지가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이냐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은 대답 대신 질문을 뒤집으셨어요.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10:36). 누가 내 이웃인지 따지지 말고, 네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 주라는 거예요.

율법교사의 대답도 재밌어요. 끝까지 "사마리아 사람"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고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10:37)라고 돌려 말해요. 그 이름이 입에서 안 나올 만큼 미웠던 거예요. 그런데 그 미운 사람의 모습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봐요. 원수 된 우리를 피해 가지 않으시고, 멈춰 서서 상처를 싸매시고, 자기 것을 다 내어 주신 분이요.

돌아보기
"누가 내 이웃인가"를 따지던 마음을 내려놓고, 나를 먼저 찾아와 싸매 주신 예수님처럼 오늘 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줍니다.
5

백에서 하나, 열에서 하나,
둘에서 하나

누가복음 15:1-32

15장은 이렇게 시작해요.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오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요.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15:2). 예수님은 그 수군거림에 대한 대답으로 잃은 것 이야기 세 편을 들려주세요.

양백 마리 가운데 한 마리를 잃은 목자(15:4-7)
동전열 드라크마 가운데 하나를 잃은 여인(15:8-10)
아들두 아들 가운데 하나를 잃은 아버지(15:11-32)

숫자가 점점 줄어들어요. 백에서 하나는 1퍼센트, 열에서 하나는 10퍼센트, 둘에서 하나는 절반이에요. 잃은 것이 점점 더 소중해지고, 찾은 뒤의 잔치도 점점 커져요. 목자는 친구와 이웃을 부르고, 여인도 벗과 이웃을 부르고,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요. 세 이야기 모두 함께 기뻐하자는 초대로 끝나요(15:6, 9, 32).

그런데 셋째 이야기에는 숨은 반전이 있어요. 아들이 둘이에요. 아버지는 두 번 집 밖으로 나가요. 한 번은 멀리서 돌아오는 작은아들을 향해 달려 나가고(15:20), 또 한 번은 잔치에 들어오지 않고 밖에 서서 화내는 큰아들을 달래러 나가요(15:28). 작은아들은 집을 떠나서 잃어버린 아들이고, 큰아들은 집 안에 있으면서도 아버지 마음을 잃어버린 아들이었어요.

그리고 이야기는 큰아들이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 말하지 않고 끝나요. 이 이야기를 듣던 사람이 누구였죠? "죄인과 같이 먹는다"고 수군거리던 바리새인들이에요. 예수님은 그들에게 문을 열어 두신 거예요. "너희도 이 잔치에 들어오지 않겠느냐?" 😄 큰아들의 대답은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 몫으로 남겨졌어요.

돌아보기
작은아들처럼 멀리 떠나 있든 큰아들처럼 밖에 서 있든, 나를 찾아 먼저 나오시는 아버지의 잔치에 기쁘게 들어갑니다.
6

누가복음에 흩어 놓은
"오늘"이라는 단어

누가복음 2:11 · 4:16-21 · 19:1-10 · 23:43

누가복음에는 세메론, 곧 "오늘"이라는 단어가 중요한 순간마다 등장해요. 구원이 먼 훗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이 오신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거예요.

2:11 —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4:21 —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19:5 —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19:9 —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23:43 —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님은 이사야 61장을 읽으셨어요. 그런데 숨은 디테일이 있어요. 예수님은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4:19)에서 읽기를 멈추고 책을 덮으셨어요. 이사야서 원문에는 그 바로 뒤에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사 61:2)가 이어지거든요. 예수님은 그 부분을 읽지 않고 "오늘 이 글이 응하였다"고 하셨어요. 지금은 심판보다 은혜가 먼저 온 때라는 선언이었어요.

그 은혜의 "오늘"이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에게 찾아왔어요. 키가 작아서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사람이었죠(19:3-4). 😄 그런데 삭개오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깨끗한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사람들 눈에는 가장 더러운 세리였는데 말이에요. 예수님은 그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부르셨어요(19:9). 그리고 몇 장 앞에서는 열여덟 해 동안 허리가 굽어 있던 여인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부르셨어요(13:16).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던 세리와 오래 아픈 여인을, 예수님은 똑같이 아브라함의 가족으로 불러 주신 거예요.

마지막 "오늘"은 십자가 위에서 나왔어요. 옆에 달린 강도가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언젠가"가 아니라 "오늘"이라고 대답하셨어요(23:42-43). 이 장면도 누가복음에만 있어요. 인생의 마지막 몇 시간을 남긴 사람에게도 은혜의 오늘은 열려 있었어요.

돌아보기
"언젠가"로 미뤄 두었던 회개와 순종을, 예수님이 찾아오신 "오늘" 붙잡습니다.
7

엠마오의 저녁 식탁에서
"눈이 밝아지다"

누가복음 24:13-35 · 창세기 3:6-7
창세기 3:7
열매를 먹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았어요.
VS
누가복음 24:31
떼어 주신 떡을 받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인 줄 알아보았어요.

부활하신 날 오후, 두 제자가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떨어진 엠마오로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었어요(24:13). 그들은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를 바랐는데 다 끝났다며 슬픈 얼굴이었어요(24:17, 21). 그 옆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함께 걸으셨지만, 그들은 알아보지 못했어요.

예수님은 길을 걸으며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성경 전체가 자기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풀어 주셨어요(24:27). 그리고 저녁 식탁에서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떼어 주셨을 때,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24:31).

이 표현이 성경에 처음 나오는 곳이 있어요. 에덴동산이에요. 하와가 열매를 따 먹고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창 3:6-7). 헬라어 구약(칠십인역)과 누가복음이 똑같은 표현을 쓰고, 우리말 성경도 똑같이 번역했어요. 첫 번째 식사에서 눈이 밝아졌을 때 사람은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고 하나님을 피해 숨었어요. 그런데 이 식탁에서 눈이 밝아졌을 때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어요. 잃어버렸던 것을 예수님이 식탁에서 되찾아 주신 거예요.

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의 이름은 글로바예요(24:18). 초대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2세기의 헤게시푸스를 인용하며, 글로바가 요셉의 형제였다고 전해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부활하신 날, 슬퍼하며 고향으로 돌아가던 친척 삼촌과 함께 걸어 주신 것일지도 몰라요. 제자들은 그 밤에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요(24:33). 이십오 리 길을 다시 걸어서요. 슬픔으로 걷던 길이 기쁨으로 달려가는 길이 됐어요.

※ 누가복음 24장이 창세기 3장을 의도적으로 떠올리게 한다는 것은 여러 학자들의 해석이에요. 누가복음의 "글로바"와 요한복음 19:25의 "글로바"는 헬라어 철자가 조금 달라서 같은 사람인지 확정할 수 없고, 헤게시푸스의 기록도 전승이에요. 엠마오의 정확한 위치도 여러 후보지가 있어요.

돌아보기
낙심해 걷는 길에도 함께 걸으시는 예수님을 말씀과 식탁에서 알아보고, 다시 기쁨으로 일어섭니다.
맺는 글
말 못 하던 제사장으로 시작해
손 들어 축복하시는 예수님으로

누가복음은 성전에서 시작해요. 향을 피우러 들어간 제사장 사가랴는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해, 밖에서 기다리던 백성 앞에 말을 못 하는 사람이 되어 나왔어요(1:21-22). 복을 빌어 주어야 할 자리에서 한마디도 하지 못한 거예요.

그리고 누가복음은 이렇게 끝나요.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베다니 앞까지 데리고 나가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하시고, 축복하시는 가운데 하늘로 올려지셨어요(24:50-51). 제자들은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했어요(24:53). 잃은 사람을 찾아 끝까지 오신 예수님이, 마침내 그들을 축복의 자리로 데려가신 거예요. 그리고 그 이야기는 누가의 두 번째 책, 사도행전으로 이어져요.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19:10)

※ 본문 인용은 개역개정을 기준으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