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 침례의 원형
사도행전을 펼치면 언제나 같은 순서가 반복됩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그리고 침례를 받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삼천 명이 침례를 받았고, 에티오피아 내시도, 빌립보 간수도 믿은 뒤에야 침례를 받았습니다. 신약교회에서 침례는 이미 믿은 사람이 자신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행위였습니다. 순서가 뒤바뀌는 일은 없었습니다.
국가와 하나가 된 교회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박해가 끝났다는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교회와 국가는 점점 하나의 몸처럼 얽히게 되었고, 교회에 속하는 것은 신앙의 결단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이 되는 절차가 되어갔습니다. 태어나면 자연스럽게 유아세례를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었습니다. 믿음보다 제도가 앞서게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남긴 숙제
16세기, 마르틴 루터가 "오직 성경", "오직 믿음"을 외치며 등장합니다. 츠빙글리와 칼뱅도 각자의 자리에서 교회를 개혁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이 위대한 개혁자들조차 손대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유아세례였습니다. 당시 국가와 교회는 여전히 긴밀히 묶여 있었고, 이 관행을 건드리는 것은 신학의 문제를 넘어 사회 질서 전체를 흔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더 철저하게 성경을 읽은 사람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물었습니다. "성경 어디에 유아세례가 있는가?"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순서는 언제나 믿음, 회개, 그리고 침례였습니다. 이들은 결론에 이릅니다. 믿는 사람만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사람들은 이들을 "다시 침례를 주는 자들", 곧 재침례파라 부르며 비난했지만, 이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유아세례는 애초에 성경적인 침례가 아니었으므로, 지금 받는 것이 그들 생애 첫 번째 침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확신이 이후 침례교 사상 전체의 밑바탕이 됩니다. (이 흐름과 침례교의 구체적 관계는 다음 강에서 다룹니다.)
1609년, 암스테르담의 결단
영국 국교회의 목사였던 존 스미스도 같은 결론에 도달한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성경을 연구할수록 유아세례가 성경적이지 않다는 확신이 깊어졌지만, 당시 영국에서 국교회에 반대하는 것은 감옥, 심하면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는 네덜란드로 망명했고, 1609년, 스스로 신앙을 고백한 성인 신자들에게 신자의 침례를 베풀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역사가들이 이 사건을 침례교의 직접적 출발점으로 봅니다. 완성된 신학을 갖고 시작한 운동이 아니라, 저항과 성경 연구 속에서 한 걸음씩 형성되어 간 운동이었습니다.
핵심 요약
- 신약교회의 침례는 믿음 이후의 공개적 고백이었습니다.
- 313년 이후 교회와 국가가 결합되며 유아세례가 사회 편입 절차가 되었습니다.
- 종교개혁조차 유아세례는 그대로 두었습니다.
- 더 철저히 성경을 읽은 이들이 신자의 침례라는 확신에 이르렀습니다.
- 1609년 암스테르담, 존 스미스의 침례가 오늘날 침례교의 직접적 출발점으로 여겨집니다.
나눔 질문
- 우리는 오늘날 "당연하게 여겨온 신앙의 관습"에 대해 얼마나 깊이 질문해 본 적이 있습니까?
- "교회는 믿음을 고백한 사람들의 자발적 모임이다"라는 확신은 오늘 우리 공동체에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 제도나 전통보다 성경의 가르침을 다시 살피는 용기가 필요했던 나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